<에피소드 1-조용한 발걸음> 0. 20** 년, 09월. 경기도 인근 외곽에 자리한 K 고등학교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작되고 있 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아침부터 축구를 하기 위해 모였던 학생들 일부가 지하실로 내려갔다는 점이다. 이 학교의 지하실은 대부분 준비도구 창고로 이용되고 있었다. 축구부 아 이들 중 3명이 체육복을 턱 끝까지 잠그며 왁자지껄 어두운 복도를 내려갔 다. 밖에서는 나머지 부원들이 열심히 몸을 풀고 있었다. 이들을 제외하고 는 아직 등교한 학생들도 드물었다. 새벽 6시 30분. 지하 1층 계단을 내려가며 스위치를 찾던 녀석들 중 하나가 갑자기 발걸음 을 멈췄다. 그것은 보통 때라면 거의 드문 일이다. “야.............” 그가 잡은 것은, 옆에서 아무 생각없이 소란을 떠는 친구의 어깨였다. “왜??” “뭔가..................이상하지 않아?” 이제 막 가을이 시작되는 단계라서 해가 늦게 뜬다. 더군다나 지하실 쪽은 아직 어렴풋한 햇빛도 투과하지 못할 정도로 아득했다. 작은 창이 1층을 향 해 계단 위에 위치했지만, 넓은 지하 공간을 비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웃기고 있네, 자식..” 어깨를 잡힌 학생은 씨익 웃으며 친구의 팔을 걷어낸다. 물론, 이 곳을 걸 어 내려 올 때, 살짝의 한기- 그러니깐 초가을과 지하실, 그리고 습기가 맞 붙는 특유의 한기를 느끼기는 했지만... “이상해!” 조금 전부터 멈칫거리던 학생은 한숨을 쉬며 친구의 옷자락을 잡아당긴다. 다른 녀석은 이미 체육준비실의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뭐가 이상해~ 봐봐~ 아무 일도.........” 덜컹- 그러나 하필 그 때 오래된 학교 건물의 나무문이 열리지 않았다. 모 든 것이 보통 때와 달랐다. “........이상해......... 문이 잠겨 있어...“ 체육실 잠금고리는 밖에서 쇠사슬로 엮어 만든 자물쇠와 안에서 걸 수 있는 체인으로 되어 있었다. 체인의 마지막이 둥근 홈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에 서 단단하게 잠길 수 없는 구조다. 세 사람은 낑낑거리다가 마침내 수위 아 저씨를 부르러 달려갔다. 운동장에서 몸을 풀며 기다리고 있을 나머지 맴버 들에게 미안했던 것이다. 몇 분 후에야 한 녀석과 수위가 드라이버를 들고 나타났다. “이거, 쇠톱으로 끊어야 겠는걸?” 덜컹거리는 문 안 쪽에서 철그럭 거리며 쇠줄 잠기는 소리 때문에 아저씨는 이맛살을 찌푸린다. “도대체 누가 안에 있는 거야? 어떤 녀석이 잠이라도 잔 거 아냐?” 팔짱을 끼며 학생들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평상이 하나 있기 때문에, 가끔 체육 준비실에 자러오는 녀석도 있지만 밤을 새고 가는 녀석은 없었다. 무 엇보다 음산하고 물기 배인 지하실이 싫었던 것이다. “어이, 조금만 기다려 보거라.” 수위는 왼손으로 문을 잡아 빈 틈을 조금 만들고 안 쪽으로 쇠톱을 밀어 넣 었다. 그 때 누군가가 갑자기 손을 올려 코를 확 틀어막는다. “우욱-.......” 과히 기분 좋지 않은 공기다. 뭔가 폐를 들썩이게 만들며 구역질나게 들 쑤 셔 왔다. “괜찮아?” 다른 녀석이 등을 툭툭 몇 번 두들긴다. 징징거리는 쇠톱의 날카로운 소리 가 요란하게 울린 탓에 더욱 기분이 묘하다. 웬만하면 그냥 갈 것을- 분실 이 잦은 체육 기구들 탓에 어제 꽉꽉 밀어 챙긴 축구공이 여하튼 문제다. “자, 다 됐다.” 마침내 쇳가루를 요란하게 뿌리며 덜컹거리던 문이 열렸다. 어두컴컴하던 복도도 조금 밝아졌고, 아이들은 한 쪽에 모여 수근거리다가 이내 문 가까 이로 걸어온다. 그때까지도 그들은 그들만의 어떤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 다. 먼저 문을 연 것은 수위였고, 아이들은 잠시 분위기에 취했다. “.........-!!!!!!!!!!!!!” 그때, 누군가가 숨이 멈추는 듯한 소리를 냈다. 한꺼번에 공기를 들이마시 면 갈비뼈 부근에서 훅- 하고 느껴지는 그런 뼈의 소리다. 아까부터 구토기 를 느끼던 나머지 한명이 급기야 와락 토해버린다. 오래된 나무 문- 그것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 시간까지도 그날 아침은 요 전 날과 다를 바 없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순간, 적어도 네 명은 기묘 한 현장을 보았다. 어두운 체육 도구실 안은 일주일 전의 청소로 그나마 기 구들과 캐비넷이 벽 쪽으로 죄다 붙어 있었다. 조금은 황량하다 싶게 비어 있는 평상 옆의 공간- 그 빈 공간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그가 앉은 채로 잠들었다고 생각했다. 똑- 똑- 이라고 .. 띄엄 띄 엄 들려오는 작은 파문의 소리, 그것이 없었다면 짙은 암영 속에서 모두들 그렇게 여겼을 것이다. 더군다나 앉아 있는 녀석은 등의 왼쪽 부분에서 스 며드는 햇살을 등지고 있었다. 역광과 깊은 어둠이 묘하게 대조를 이루며 잠든 녀석을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깨달았다. 체육실 안의 녀석은 잠든 것이 아니었다. 그 는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흡사 짓이겨진 인형처럼 맥없이 앉아 있었을 뿐이다. 더군다나 그 그림자보다 더 확실하게 코를 자극하는 피 냄새- 친 구를 말리던 녀석은 얼어붙었다. 그 습한 수증기 안에는, 알알이 맺힌 자주 색 핏방울마저 섞인 기분이다. 어둠에 익숙해질 때쯤에야, 그들은 똑똑히 보았다. 의자 위로 늘어진 듯 앉 아 있는 누군가를. 그리고 그의 손목에서 끈끈한 점액질로 바닥을 늘어진 핏줄기들을.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기운 어깨위로 고개가 살짝 내려간 그는, 한쪽으로 드리운 팔 아래쪽에서 계속해서 떨어지는 핏자국을 딛고 있었다. 순간 시간이 얼어붙었다. 세 녀석은 무심결에 서로를 꽉 붙잡았고 수위는 다급하게 위로 뛰어 올라갔다. 나머지는 모두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들은 그 잔혹한 현장에 시선이 얼어붙었다. 천정을 향해 나 있는 작은 창문으로 아침 햇살이 뉘엇거리며 기어 들어온다 . 몇 가닥의 빛줄기를 맞으며 마치 그들을 기다리듯 헤집어진 인형 같았다. 어둠 속에서 간신히 보이는 얼굴은 눈에서부터 흘러내린 핏자국들로 끔찍 한 가면처럼 느껴졌다. 지하 체육 준비실에 앉아서 그들을 기다린 존재- 그 것이 바로 몇 시간 전에 적어도 사람이었음을 느끼게 한 것은 오직 흥건한 혈액의 잔치- 그 피 냄새 외에는 없었다. 1. 햇살이 창문을 부비며 들어왔다. 그것은 한 사내가 잡은 종이 끝,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화이트보드, 그리고 몇몇이 돌리고 있는 연필 끝에도 그 햇 빛은 여과없이 들이닥쳤다. 저널리즘은 없지만, 대중성만은 끝내주게 좋은 잡지사 ‘GAS(gossip and sc andal)' 의 2층 회의실에는 그들의 전 직원이 모여 있었다. 전 직원이라고 해도 이제 5명이다. 그 중에서도 서류 몇 가지를 들고 인상을 찌푸린 채 입 을 여는 사람은 바로 취재부장인 박기훈이다. “.......이렇게 해서, 경기도의 K 고등학교에서 한 녀석이 죽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자기네 학교 지하실에서 어른들도 오싹하게 만드는 방법 으로 죽었지. 아직은 수사중인 단계이고... 결과가 발표되기 전이니, 어서 이 특종의 전말을 알아와!” 올해로 42세가 된 부장 박기훈이 바로 이 GAS의 총책임자이다. 3년 된 발행 지 GAS를 건설하기 전까지 그는 주로 이벤트와 무대 기획자를 맡았었다. 그 런 그가 퇴직금을 통틀어서 마련한 회사가 바로 3류 황색 르뽀의 결정체, ‘가쉽과 스캔들’이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일명 ‘대박’에 대한 그의 더듬이성 안테나는 실로 놀라웠다. 그것은 오늘로 이곳에 입사한지 만 6개월 째인 사회부 기자 한기 혁에게도 마찬가지다. 기혁은 박부장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자 신은 원래 성격자체가 그런 편이다. 딱히 호불호(好不好)를 표현하지 않는 다. 그런 취향이나 기호가 정해지기에는 너무나 이성적인 편이다. 이성적이 면서도 다소 신랄하다. 어쩌면 그 유명한 ‘언론고시’도 없이 덜컥 인맥과 수단에 의해 기자가 된 것도 그런 성격 탓이다. 사실 낙하산 인사다. 그저 전공이 사회학이다 보 니 아는 사람에 아는 사람들을 거쳐 이 곳에 입사하게 된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기혁은 마당발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잘 흔들리지 않는 초연한 표정 - 바로 그 이점 때문에 사회 권력자들도 그에게 곧잘 가쉽을 알려주기 일쑤 였다. 아니, 그렇게 따지면 다들 마찬가지다. 이 볕 좋은 2층에 앉아서 회의하는 GAS의 나머지 직원 3명도 저널리즘이니 기자정신은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 문화부담당 강율곡만 해도 그렇다. 서른인 기혁보다 4살이나 어린 율곡은 벌써 3년 전에 이곳에 입사했다. 부장은 율곡을 뽑은 이유가 그의 ‘독특한 ’ 어떤 것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긴 율곡이 잡다한 상식에 강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리고 딱히 대학을 가지 않아도 집요할 정도로 학구적이고 침착 한 이성이라는 것을 자신도 안다. 브리핑 하나는 끝내주게 잘한다. 모두가 손에 쥐고 있는 이 서류조차도 어제 밤에 율곡이 밤을 세어 정리한 것이다. 자신과 대각선 방향으로 끼고 앉은 유일한 여기자 조미경은 또 어떤가. 그 녀 역시 나이 서른이었고, 입사한지는 일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그 이전 까지는 학교에 계속 있었다고 들었다. 전공이 정치외교학이다 보니 아무래 도 정치부 담당이지만, 그녀의 이성 또한 차갑고 진지하다. 그럼에도 기혁 은 그녀가 상당히 휴머니스트 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바로 그런 그녀의 ‘감정적인 인간애’ 때문에 곧잘 자신과 논쟁이 붙었으니 말이다. 지금만 해도 그녀는 단정하게 목덜미 뒤에서 자른 짧은 머리에 검은 바지를 입고 긴다리를 꼬은 채, 팔짱을 끼고 있다. 갸름하고 아름다운 하트형 얼굴에서 는 중성적인 약간의 매력과 함께 공격적인 성향의 눈빛이 잘 드러났다. “집중 좀 하라구, 이유신!” 마지막으로, 부장이 화이트보드를 두들기며 주목하게 만드는 기자, 스물 여 덟 살의 이유신. 이 쯤에서 기혁은 벽에 걸린 시계를 한번 쳐다보고 짧게 한숨쉬었다. 오늘 은 아침부터 머리가 굉장히 아팠다. 바로 부장이 지적한 이유신이라는 녀석 때문이다. 입사한지 6개월 내도록 이유신이야 말로 다혈질인 부장에게 가 장 잘 어울리는 사이코라고 여겨왔다. 그것은 곧, 자신과는 다른 세계의 사 람이라는 의미다. 관심을 비롯해서 아주 최소한의 친밀감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 없었다. 사실 한 달 전까지도 그랬다. 자신이 어쩌다가 유신과 함께 자기 전까지는 그랬다. 젠장- 또다시 지끈 지끈 관자놀이에서 열이 났다. 이런 현상은 한 달 전부터 유신 을 떠올리면 늘 지속되는 현상이다. 어쩌다가 유신과 잤는지- 비록 아침에 는 둘 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 사무실에 나와서 또한 아무렇지도 않게 일에 전념했지만- “문어 대가리는 그만 그려!!” 다혈질의 박부장이 잘생긴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유신을 향해 손가락질 한다 . 아니나 다를까- 자신이 초천재라고 우기는 웃기는 이유신은 박부장의 이 장황한 브리핑에도 상관없이 종이 위에 뻑뻑거리며 문어 대가리에 외계인을 그리고 있었다. 일산에 위치한 3층짜리 사무 주거 통합 형태의 목조건물- 이른바 대한민국 에서 3류 황색 르뽀 대박들로 그래도 발행부수 몇 위에 꼽히는 잘난 회사 G AS. 아무리 GAS가 ‘믿거나 말거나’류의 기사를 유포한다 하더라도 기본적 인 책임감은 있다. 적어도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난 기사는 안 보는 게 철칙이다. 언론 정신은 없지만, 기본적인 룰은 지킨다. 어쨌든 그들은 총 다섯명이고 적어도 기혁이 아는 한, 그 중 하나는 극도로 흥분해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두통 때문에 고생이었다. 2. 기혁이 자리에 앉는 것과 동시에, 율곡이 어깨 너머로 커피를 불쑥 내밀었 다. 스물 여섯이지만,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강율곡. 녀석의 단아한 표정을 보며 기혁은 말없이 머그컵을 받는다. 맴버들은 주로 이 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편이었다. 바로 옆건물에 자리한 편집기자들도 그 쪽에서 나름대로 먹고 자는 편이다. 다만 마감 데드라인 이 걸린 15일 정도는 그렇게 지낸다. 나머지 15일 동안 취재기자들은 그나 마 프리한 생활을 즐기는 편이다. 교정과 사진부는 주로 프리랜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다. 욱씬- 기혁은 다시금 머리가 아파왔다. 이번 달 마감 기사를 날렸다. 지금 부장이 아침부터 사람들에게 ‘K고등학교 의문의 자살사건’을 닦달하는 것 도 그 때문이다. 마감, 마감, 마감 - 그나마 ‘믿거나 말거나’류의 기사를 주로 써서 엄청난 구라 시사들을 생산해내는 공장지대 GAS의 최대 목표다. 그들의 사무실 입구에는 이런 표어가 걸려 있다. ‘적어도 마감일만 지켜 라.’ “유신이 선배 모교라고 하던데..........” 율곡의 중얼거림에 기혁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사무실 내경이 한 눈에 보 인다. 한곳으로 틔운 50평 정도의 넓은 사무실 공간에 유리벽으로 서로의 자리를 분할했다. 그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해도 상대방이 뭘하는지 뻔히 보 였다. 물론, 잘들 알아서 컴퓨터 모니터를 구석에 짱박아 놨지만 말이다. 기혁에게 유신의 자리는 바로 맞은 편이다. 또한 가끔 들려서 커피를 내려 놓는 율곡의 자리는 오른 쪽 옆이었다. “이유신이 모교라구?” 천연덕스러운 편인데다가 장난기 많은 유신이라 그런지 녀석의 좋은 두뇌가 가끔 아까울 정도다. 녀석의 신세대답게 마구 잘라놓은 염색 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기혁은 율곡이 이상하게 쳐다볼 정도로 오랫동안 그 뒷통수를 노 려보고 있었다. 뭔가 또 책상에 앉아서 ‘프리하게~’ 문어 대가리를 그리 고 있을 이유신이다. “유신이 선배 모교래요. 안 그래도 은사님한테 전화 받았다고..그 K고등학교 일 때문에...“ 오라, 그래서 부장이 더 신이 난 거다. 마당발에 마당발- 적어도 이 계통에 서 오랫동안 믿기지 않는 기사들을 써대며 게기려면 그 정도 인맥과 마당발 이 필요하다. “국과수(국립과학수사연구소) 에서는 뭐라 그래?” 심드렁하게 눈길을 거두며 기혁은 서류를 뒤적인다. 아침 회의에서 받은 종 이뭉치다. 아무리 보아도 여기자 조미경은 이 일에서 손을 땠다. 그녀는 정 치부기자이고 자신이 사회부 기자이니 이 일은 자신의 소관이다. 그래도 국 가 기관에 잦게 출입하는 조미경이 건져오는 이야기들- 이른바 ‘off the r ecord (어떤 사실을 밝히되, 보도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말함)' 가 더 유 용하다. 사실, GAS에서 기자를 뽑는 유일한 조건은 데모 기사가 아닐지도 모른다. 오직 얼마나 많고 폭넓고 이용할만한 인맥을 가졌는가- 하는 것이 주요 관 건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유신은 실격이다. 어쩌면 강율곡도 실격이다. 적 어도 GAS에서 인기 있는 정보통은 자신과 조미경이다. 또한 외부에서 들락 거리는 각종 인사들과 계약직 기자들이다. 요새 항간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K 고등학교 사건 같은 경우에도 국과수나 검찰을 왔다 갔다 할 조미경이 정보통이다. 그러니 그녀가 옆 사무실의 율 곡에게 뭐라고 말했을 것이 뻔하다. 어제 밤을 둘 다 철야했으니 이 리포트 를 정리한 율곡이 아는 게 훨씬 많을 터였다. 율곡은 미경의 자리를 힐끔 쳐다보더니 기혁을 향해 중얼거렸다. “조 선배가 그러는데.. 한달 가까이 흘렀는데, 아무래도 자살 쪽으로 기우는 것 같대요.“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기혁은 포스트 잇에 붙은 메모들을 확인하며 다소 냉소적인 표정으로 비아냥거린다. “........어떤 미친 새끼가 자기 눈을 24번이나 찌르고 뵈는 것도 없는 상 태에서 손목을 긋냐? 그 새끼 미친 거냐?” “혹시 모르죠. 오이디푸스같은 콤플렉스가 있었던 녀석인지....” 오이디푸스(Oedipus)라. 아폴론의 신탁에 의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해서 자기의 눈을 빼버렸다는 그 전설의 왕? 기가 막힌 표정으로 율곡을 노려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거린다. “어쨌든, 유신이 선배는 오늘 오후에 학교로 가 본대요. 나도 여차하면 따라갈 생각이고... 선배도 같이 가지 그래요? 의외의 소득이 있을지 모르잖아요?“ “이유신과 같이 가서 어지간히 소득이 있겠다...” 기혁은 잔뜩 조소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노트북을 연다. 유신이 저 쪽에서 기지개를 켜다가 얼핏 이 쪽과 눈이 마주쳤다. 녀석이 장난스럽게 웃자, 기혁은 재빨리 고개 돌렸다. 자신의 눈 아래에는 사진과 보고서가 자리 잡았다. 아침에 브리핑을 하며 열심히 들여다 본 그 서류다. 이 쪽까지 피 냄새가 날 것 같은 현장- 이른 바 K 고등학교 자살 미스테리 현장이다. “검찰에서는 뭘 근거로 도대체 자살이라고 보는거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소리였다. 율곡이 커피 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가려다 다시 뒷걸음질친다. 어느 새 다가온 녀석과 함께 스탠드를 켜고 사진들을 들여다보았다. 조미경과 부장이 나름대로 어디선가 빼돌린 사진들이다. 밖 으로 누설될 수 없고, 결코 실릴 수 없는 사진들. 사진 안에는 닳을 정도로 보아온 시신 한 구가 놓여 있었다. 가까이서 찍은 사진, 멀리서 현장 그대로 찍은 사진, 그리고 갖가지 각도와 원근조절로 찍은 사진들. 한눈에 보아도 어두운 지하실이고, 사방에 가득 매운 체육 기 구들뿐이다. 그 가운데에 어울리지 않게 덩그라니 앉아 있는 한 녀석. 그것 이 애당초 어떤 얼굴이었는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얼굴 윤곽은 그대로 인데 , 얼마나 눈자위를 여러 번 찔렀는지, 죽은 녀석은 흡사 패왕별희에 나오는 분장이라도 한 것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영화 패왕별희는 말 그대로 분장이고, 이 쪽은 핏물자국이라는 것 외에. “발자국.. 발자국과 안으로 잠긴 문 때문이죠, 뭐.“ 미간을 흐리며 사진을 골똘히 노려보자, 율곡이 뒤에서 가볍게 손가락을 내 민다. 녀석이 누르듯 가리킨 곳은 사진 안의 발자국이다. 복사본 사진이지 만 최대 해상도로 다운 받은 것이기 때문에 발자국 정도는 능히 보였다. “..............??........” 체육 준비실 입구에서부터 얌전하게 찍혀 있는 발자국. 그 발자국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게 한 방향으로 걸어간 흔적이다. 중간에서 망설인다든지 동 요하는 기색도 없이 시체가 앉아 있던 의자까지 고요히 진행되었다. “미치겠군...이거..” 기혁은 혀를 찬다. 아무리 보아도 기묘하다. 율곡 역시 같은 생각이라는 듯 , 그런 자신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등 뒤에서 대뜸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꺼어들었다. “마치 죽기 위해서 작정하고 걸어간 사람같죠?” 이유신이다. 기혁과 율곡이 담소를 나누는 동안, 그새 참지 못하고 등장한 GAS 의 악동 이유신. “그렇군.” 마지못해 대답하자, 유신이 청바지 뒷 주머니에 손을 낀 채, 어슬렁 어슬렁 그들에게 다가왔다. 율곡은 선배인 유신에게 적당히 자리를 비킨다. 율곡 이 거의 190cm 에 가까운 듬직한 체격이었고, 유신도 그보다 조금 작은 키 였다. 그나마 유신이 율곡보다는 큰 덩치가 아니고 늘씬한 체격이어서 기혁 은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하긴 이유신이 등장하면 그 때부터 곤란해지는 건, 비좁음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유신이라는 존재자체가 민폐이자 곤란함일 뿐. “이상하죠, 선배?” 아까 회의 시간에는 그렇게 열심히 문어 대가리만 그리고 있더니 그래도 이 럴 때만큼은 총명하게 눈빛을 빛낸다. 그는 가혁과 율곡 사이로 다가와서 조금 전에 그들이 지켜보던 발자국 사진을 한동안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졸업한 모교라서 그런가- 녀석의 옆 모습이 날이 선 것처럼 반듯하 고 단정했다. 뭔가 꽤나 집중하는 표정이다. 그는 그대로 주머니에 손을 꽂 고 사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이상한 게 뭔지 알아요?” 기혁과 율곡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어리둥절해 했다. 정작 말을 꺼낸 녀 석은 한동안 계속 사진만 바라본다. 막상 고개를 들어 입을 연 것은 몇 초 가 흐른 후였다. “이상하지 않아요? 밀실- 안으로 잠겨진 문, 조금 쌓여 있는 먼지, 죽은 마지막 장소까지 이동 한 한 사람의 발자국, 발치에 떨어진 자살 도구, 흥건한 핏자국.. 이런 건 자살이라고 믿을만한 장치가 돼요. ..........그럴 거라고 나도 이해해요.“ “......그런데?” 뭔가 꺼림칙한 느낌. 유신의 말처럼 그 모든 정황적인 상태가 자살로 느껴졌다. 그럼에도 뭔가 꺼림칙하다.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뭔가의 기분이 척추에 얼음이 놓이듯 오싹하게 만들었다. 유신은 손가락을 금발의 머리카락 사이에 넣는다. 그 상태로 조금 헝클어뜨 리며 짧게 웃었다. 천진난만한 웃음을 가진 사내다. 한기혁은 살짝 시선을 피했다. 유신이 그런 기혁을 놀리듯 조금은 가볍게 덧붙였다. “나도 기혁 선배처럼 왜 자살하는 녀석이 눈을 그렇게 여러번 찔렀는지가 의문이야. .......그리고 가장 의문인건.....“ “...발자국?” 율곡이 묻자, 유신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가장 궁금한 건, 도대체 언제부터 체육준비실에 안으로 잠 그는 체인이 필요하냐는 거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보통 학교에서 교실이나 도구 준비실 문이라고 하면, 밖에서 잠그는 자물쇠 가 대부분이지 않아? 체육 준비실은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 아니라구..“ “..........!!!!!!!!......” “난 그게 가장 궁금해. 안에서 잠궈야 하는 장소.. ...자신을 가둔다는 의미인데, 그런 경우는 두 가지 중 하나지. 생명에 위협을 받고 있었거나, 혹은 장소 안에서 밖으로 내보내지 않아야 하는 비밀스러운 일이 있었거나...“ 기혁은 정말 한기가 느껴졌다. 율곡 역시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손 가락으로 턱을 쓸었다. 유신의 말이 옳았다. 3. “안전밸트나 제대로 매.” 율곡이 뒷자석에 타는 순간, 기혁은 시큰둥하게 옆 자리를 돌아본다. 유신 이 앉아서 뭐라고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K 고등학교로 출발하기 전부 터 이미 미술부장에게 엄청 깨졌다. ‘꼭지 좀 지키란 말이에요, 꼭지 좀!! ’- 하도 그 잔소리를 많이 들어서 다음에 딸 낳으면 꼭지라고 이름 붙일지 도 모른다. “어느 쪽으로 가야하지?” 출발할 때부터 벌써 4시를 넘겼다. 이리 저리 팩스 보내고 잔소리 듣는 시 간까지 넉넉히 생각질 못했다. 더군다나 지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유신이 었다. 문제는 그런 유신이 종이를 들여다보며 흥얼 흥얼 거리고 있다는 것 일 뿐. ‘키스해 주세요, 울랄랄라~’ 뭐, 이 따위 노래들. “이유신!!!” 제발 일 좀 하자- 라고 으르렁 거려봤자 소용없다. 유신은 타인의 눈치를 보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아주 드물게 녀석이 짓는 진지한 표정 외에, 이 유신은 남에게 참 신빙성 없는 인간이었다. 그런 녀석이 연예부 기지라고 그래도 낼름 낼름 기사를 준비하는 건 신기할 따름이다. “우회전..” 지금 만해도 유신은 마치 기혁을 자신의 기사인 냥, 거드름 피며 부려먹는 다. 그것이 괘씸했지만, 꾹 참았다. 어쨌든 공조해서 서로 좋은 기사를 얻 을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율곡이 혼자 뒷 자석에서 유신의 노래에 손 목을 까딱거리며 불쑥-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뭐 읽고 있어요?” “응, 선생님이 보낸 글들..” 입술을 내밀고 잘생긴 얼굴을 조금 흐리며 유신이 대답했다. 그 모습을 힐 끔 쳐다보며 기혁은 핸들을 꺾었다. 이래저래하면 도착할 때까지 한 두시간 이 걸릴 것 같다. 혼잡한 도로를 벗어나기까지 유신의 이야기만 듣고 있어 도 시간 때우기에는 만점이다. “강율곡!” 종이위로 뭔가를 적어가며 삐뚤 삐뚤 줄을 긋던 유신이 갑자기 뒤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율곡이 따라온 것은 그가 문화부 기자이기 때문이다. 아마,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자살사건만큼 쇼킹하고 무서운 문화 칼럼이 준비되지 않았던 탓이다. 것도 아니라면 순수한 진실에의 욕구이거나. 아무튼, 묵묵히 운전만 하는 기혁을 젖혀두고 두 사람은 그들만의 대화에 단단히 빠진 것 같았다. “아까 오이디푸스 신화 이야기 했지?” “그거야 기혁이 선배가 말한 거죠.” “짜식, 토 달기는-!! 어쨌든, 심리학은 니가 공부한 분야잖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뭐지?“ 아아- 라고 율곡이 짧게 한숨쉬었다. 그리고는 단조롭고 침착한 목소리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차창 밖으로는 도시 외곽을 달리는 푸른 나무들과 어 느 새 기우는 저녁의 기운이 물씬 우러난다. 이 가을의 고즈넉한 기운은 아 무래도 환상처럼 다가왔다. 이 시즌에 취재라니- 보통 때라면 적당히 마감 하고 정리할 시간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원래 소포클레스에 의해 쓰여 진 비극 중에 하나에요. 그게 일종의 남성의 거세 공포증이라는 콤플렉스 의 이름으로 쓰인 건 프로이드 때문이고.. 말 그대로 거세 공포증이죠. 태어날 때부터 보아온 여성상 어머니를 중심으 로 아버지와 심리적인 경쟁을 겪는다는 이론이에요.“ “..........그래? 자라면서 계속 아버지를 적으로 간주하는 건가, 그럼? 죽은 녀석이 눈을 24번 찔렀다는 건 결국 근친을 상징하는 거야? 도대체 무슨 의미로 받아들여야하지?“ 기혁은 이미 그 녀석이 미친 거라고 단정 지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정말 자 살하려면 그렇게까진 하지 않는다. 그러니 자살이라는 결론이 너무나 빠른 단정이거나 혹은 거짓된 정보인 게 뻔하다. 누군가 죽었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사고사가 아니라면 결론은 하나다. 다른 사람이 녀석을 죽인 것이 다. 도대체 그 녀석이 왜 죽었거나 죽음을 당했는지도 모르는데 눈을 찌른 것은 더욱 미스테리다. 기혁이 속으로 혀를 차듯, 율곡도 난감한 기색이었다. 조심스럽게 미소지으며 한 쪽 어깨를 으쓱 올린다. “모르죠. 선배 말처럼 근친에 대한 하나의 상징일 수도 있죠. 만약 선배가 의심하듯 살인이 일어난 거라면, 죽인 사람이 ‘시각’에 대한 공포증을 가졌을 수도 있구요.“ “시각에 대한 공포증이라- 그럼 보여지거나 보여진 어떤 것- 그것을 광적 으로 두려워했단 말이겠네.. 아아.....역시 잠겨 있던 문이 이상해. 문이야 얼마든지 바깥 쪽에서 안 쪽으로 잠게 할 수 있다구. 일종의 마술사들처럼 트릭을 쓰면 해결할 수 있는 일이야. 발자국도 마찬가지고...“ “그런 거야 선배가 더 잘 알겠죠. 선배가 과학을 공부했으니 우리보다는 제대로 관찰하고 분석하겠지만.. 아무튼 심리적인 외상은 설명할 길이 없어요. 우리가 시체를 본 것도 아니고, 경찰이나 검시관도 아닌데 복잡하게 볼 필 요도 없고..“ 흐응- 이라고 유신이 다시 자세를 바로잡으며 작게 콧소리를 낸다. 녀석은 잘생겼다. 갸름한 얼굴에 짙고 긴 속눈썹, 오똑한 콧날 등이 시원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한마디로 나이트 가면 부킹하기 좋은 얼굴이라는 말이고, 다 르게 표현하면 연예부 기자로써도 썩 괜찮다는 말이다. 하긴, 바로 녀석의 그 얼굴 때문에 기혁과이 사이에 문제가 생겼으니 더할 나위 없다. 그는 기혁 쪽은 안중에도 없다는 표정으로 종이 위에 뭐라고 북북 적으며 중얼거렸다. “의도된 살인은 자신의 어떤 것을 외적으로 제거하려는 노력이지. 한마디로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는 분노나 왜곡된 감정을 표현하는 거야. 살인범들에게는 모두 자기 변명이 있지. 나는 정말 이러고 싶지 않았어-!!..그런데 이렇게 되었어..라는. 마치,... 어제 누군가와 섹스를 했는데 그게 술김이라고 핑계를 대는 누구처럼 말야. “ 끼익- 물론 신호를 받았기 때문이지만, 차가 갑자기 급정거했다. 율곡이 뒷 자석 에서 놀란 듯 눈을 깜박였고 곧이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기혁은 그 순간 에 아무 말 없이 담배나 빼물었다. 유신의 그 중얼거림이 자신에게 한 비난 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4. 누군가 대가리에 총을 들이대지 않는 이상, 혹은 누군가 목에 칼을 대지 않 는 이상 기혁은 유신과 잘 생각이 없었다. 그것이 설령 술에 취해 그저 펠 라뿐이었다 하더라도 기혁은 적어도 그랬다. 같은 사내 녀석에게 성욕을 느 끼고, 그 나신을 만질 정도로 굶주리진 않았다. 그 정도는 아닐 만큼 기혁 은 이성적인 편이었고, 지금까지 냉정했었다. 더군다나 그는 외부적인 환경에서도 하등 그럴 이유가 없다. 기혁은 잘 사 는 집안의 아들이었다. 적어도 집에서 놀고먹기 눈치 보이고, 명함에 찍을 이름이 필요해서 부업 겸 GAS에서 일하는 것이지, 특별한 사명감은 없었다. 이름값을 할 만큼 괜찮은 대학에서 괜찮은 공부를 하고 나왔고, 여자 친구 도 많았으며 냉철한 판단력 덕에 무리 없이 살아왔다. 넘치는 게 여자인데 자신이 유신을 건드릴 이유는 더욱 없었다. 그런데 문득 그 이유신과 사고를 치고 말았다. 사건의 원인은 바로 유신이 인터뷰하러 만난 가수 ‘시아’ 때문이었다. 시아야 말로 자신의 이상형이 었던 것이다. 어느 날 시끄럽게 사진을 들척이며 자기 앞에서 의기양양한 유신이 얄미웠다. 그 탓에 시아를 소개 시켜 달라고 한 마디 던진 건데, 녀 석이 대뜸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한 것이다. ‘그 여자를 소개시켜 달라구요?’ 기가 막혀 하는 표정 때문에 기혁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나한테 그 여자를 소개시켜 달라구요?’ ‘그래.’ ‘선배는 바람둥이잖아요?’ ‘그것도 그래. 하지만 여자와 돈은 많을수록 좋은 거지.’ 녀석은 할 말을 잃은 눈치였다. 너무나 확고하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입사한지 6개월이 된 기혁과 훨씬 더 오래 일해 온 유신은 서로 말없이 쳐 다보았다. 기혁으로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녀석은 별 수 없다는 듯 눈동자를 굴리며 웃었을 뿐이니깐. ‘재미있네요, 선배.’ 그리고 같이 나갔다. 홍익대 근처의 까페에서 시아와 만났다. 핸섬한 기혁 과 유쾌하고 호감가는 유신 때문에 그녀도 기쁜 눈치였다. 그래서 그렇게 술을 마셨다. 한참을 머리 꼭지 빠지도록 마셔댔고, 일어나 보니 시아는 그 곳에 없었다. 대학가 근처의 한 여관에 벌거벗은 채 나란히 잠든 유신과 자 신 - 이렇게 둘 밖에 없었다. ‘무슨 일 있었지?’ 셔츠를 입으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묻자, 유신은 침대에 앉아 금발의 헝 클어진 머리를 북북 긁었을 뿐이다. ‘선배랑 나랑 섹스했죠.’ ‘....................’ 세상의 그 누구라도 그런 말을 그렇게 대범하게 하진 못할 것이다. 기혁은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너랑............나랑?’ ‘그럼 여기 누구 딴 사람 있어요?’ 아아, 내가 미쳤군, 돌았어. 기혁은 순간 눈앞이 하얗게 질렸다. 욱하고 자신에게 뭔가가 치밀었고, 그 리고 고분 고분 같이 즐긴 이 상대방에게도 화가 치솟았다. 내가 취했어도 너는 말렸어야지!!!! ‘남자랑 안 자봤어요?’ 주섬 주섬, 녀석은 바지를 입으며 미끈하게 잘 빠진 상체에 옷을 걸쳤다. 세상에!..누가 남자랑 자 보는 게 보통의 일이겠는가. 그것도 같은 직장의 동료에게! 하물며 어떤 경우에도 가벼운 너같은 종자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니, 이유가 있다 해도 아무런 계기도 없이! ‘허리 아프지 않아요? 뻐근할 것 같은데...’ 그러나 녀석은 더욱 놀리듯 말하며 옷을 입었을 뿐이다. 기혁은 회사를 그 만둬야겠다는 마음 밖에는 없었다. 끊어진 필름, 드문 드문 기억나는 영상- 그러니깐, 절대 그 순간에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어떤 회상들 때문이었다. 믿을 수 없다. 자신이 미친 게 분명하다. 유신의 턱을 잡아 당겨서 입맞춤 하던 기억이 뿌옇게 머리 속에 떠올랐다. 뇌의 한 부분에 단백질처럼 스며 든 그 기억들은 이어지지 않고 툭툭 끊어지며 계속되었다. 입 맞추고, 옷을 벗기고, 정신없이-.........하느님. ‘잘 들어, 이유신.’ ‘..........듣고 있어요. 그렇게 화 내면서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구요. ’ ‘시끄러워, 새꺄. 누가 뭐래도 이건 실수야. 내가 너와 잤을 리가 없어.. 아니면 니가 나와 잤을 리도 없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진정해요. 선배. 펠라가 전부였어요. 펠라였다구요, 펠라.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철썩- 그 순간의 혼란과 충격- 그리고 분노 때문에 기혁은 판단력을 잃었다. 보통 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 그러니깐 폭력까지도 그는 같이 행사한 것이다. 얼얼한 손바닥과 붉어진 유신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기혁은 스스로에게 얼이 빠졌다. 때리려고 했던 게 아니다. 너무나 장난처럼 말하 는 상대방에게 그 찰나에 이성을 잃었을 뿐. ‘난 너랑 잔 게 아냐, 이유신.’ ‘.................’ 입사할 때부터 환하게 웃으며 요란하던 녀석. 이유신은 그 순간에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렇게 조용한 유신은 그 날 처음 본다. 그 이후로도 물론 본 적이 없다. 5. 유신의 모교, 문제의 K 고등학교에 도착하자 벌써 6시였다. 뭔가 떨떠름한 기분으로 기혁은 교무실에 들어섰다. 마치 쓴 술을 마시고 입 안을 헹구지 않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러나 율곡은 늘 그렇듯 침착한 표정이었고, 유신 은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은사님께 인사했다. “안녕하셨어요, 선생님! 이 쪽은 사회담당 기자 한기혁씨, 이 쪽은 문화담당 강율곡씨. 율곡씨, 한선배님, 이 쪽은 제 2학년 때 은사님 유기형 선생님이세요. 국어 선생님이시죠! 깐깐하고~ 잔소리 많고~” 언제나 밝고 유쾌한 목소리. 이유신의 등장으로 선생님들도 거의 퇴근한 교 무실이 활기를 띤다. 기혁은 일단 개인적인 생각은 접기로 했다. 어쨌든 일 때문에 온 것이고 그들은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진지했다. 유신의 은사님은 국어담당으로 머리카락이 듬성 듬성 빠져 있었다. 길고 네 모난 턱이 고집스러운 인상을 잘 전해주고 있었고, 말을 할 때마다 곤혹스 러운 듯 수건으로 몇 번이나 얼굴을 닦았다. 이야기는 적어도 그들 앞에 커 피 몇 잔이 놓여졌을 때야 시작되었다. “죽은 녀석은 2학년이고 축구부 부장이었던 태욱이라는 녀석이야.” 율곡이 주섬 주섬 카메라를 꺼낸다. 보통 프리랜서 사진기자들이 따라붙지 않을 때는 율곡이라도 촬영을 하기 마련이었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율곡은 말수가 적은 반면 잡기에 능했다. “유신이는 체육 준비실이 있을 때 졸업했나?” 막상 유신을 이 자리로 부른 국어선생은 여전히 이 사건이 곤혹스러운 듯, 의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이유신이 고개를 저으며 씽긋 웃었다 . “아뇨. 제가 다닐 때는 그 쪽 지하 교실들이 다른 기자재로 가득 차 있었어요.“ “.........그래. 지하에 있는 4개의 교실 중에서 마지막 교실이 체육 준비실로 쓰인 건 적어 도 5년 전이군.“ “하지만 선생님이 말씀하신 게 건물 어딘지는 알아요.” 유신은 자신의 취재수첩을 열고 연필을 집어 들었다. 녀석의 수첩은 다른 것들이 마구 끼어 있어서 언제나 두툼한 편이었다. 가운데를 손바닥으로 눌 러 꾹꾹 피며 흰 여백 위로 연필 심을 긋는다. 기혁이 이 건물에 들어올 때 확인한 모양처럼 학교는 ㄱ자 모양이었다. 밝고 명랑한 녀석의 목소리가 연필의 선에 묻어 흘렀다. “우리학교는 남동쪽으로 난 ㄱ자 모양의 건물이에요. 전체 5층이고, 위로 4층은 교실로 쓰고 있어요. 지하 1층만 각종 기자재 준 비실로 쓰죠. ㄱ자 모양은 입구와 계단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갈라져요. 그 중에 가장 통로가 짧은 쪽 교실 4개가 지하의 준비실로 쓰이고 있어요.“ 계단과 입구까지 꼼꼼히 그린 도면도 아닌 도면도 위에 선생은 다른 연필을 들어 가장 구석에 놓인 교실을 가리켰다. “그래, 그리고 태욱이가 발견된 곳은 여기. 아이들과 수위에게 발견되기 적어도 몇 분전에 죽었다는 결론이었어. 사인( 死因)은 역시 과다출혈. 왼쪽 손목에 그은 여러 개의 자상 중에서 가장 날 카로웠던 상처가 동맥을 건드렸지. 그렇지만, 1차 사인이 과다출혈인 이유 는, 이미 얼굴에서 시작되었어. 발견되고 나서 몇 분 후에 죽었으니 더 안타깝지...“ “한마디로 얼굴에 찌른 24번의 자상 때문이군요.” 유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선생님이 보내 준 그 녀석의 사진. 잘생긴 녀석이야. 하지만 뭔가 탐탁치 않은 눈동자야.” 수첩에서 주섬 주섬 꺼낸 사진 속 녀석은 잘생긴 얼굴이었다. 기혁은 유신 이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사진 속 얼굴은 호감가는 얼굴이다. 그다지 범죄형으로 생기지도 않았고, 또래들에게 인기가 많을 법 한 느낌이다. “안타까운 일이지.” 선생은 막상 녀석의 사진이 나오자 더욱 난감한 듯, 식은땀을 훔친다. “녀석은 인기가 많은 편이었어. 축구부 녀석들에게도 인기가 많았고, 근처 여학교의 여학생들에게도 한창 주가가 오르는 녀석이지. 왕따도 아니었고,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지만 학교 생활에 문제가 있지도 않았어. 자살할 이유도 못 찾겠고, 이대로 가다간 학교가 문 닫을 지경이야..“ 아아- 라고 율곡이 짧게 신음했다. 유신은 그 사진을 다시 수첩 안에 밀어 넣으며, 곧 터질 것처럼 빵빵한 수첩표지를 두어번 두들겼다. “자, 우리는 처음 발견했던 녀석들을 만나야지. 선생님이 녀석들을 잡아 놓고 있었죠?“ 나이가 중년을 넘긴 국어선생은 간략하게 고개 끄덕였다. “유신이 부탁대로 과학실에서 기다리고 있다. 어차피 세 녀석 모두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고, 십년이 넘게 일해 온 수위 아저씨는 이미 학교를 그만뒀어. 학생들도 요새 절반 정도는 학교를 안 나오지..“ 기혁은 커피의 마지막 한 방울을 음미하며 그 말에 수긍했다. 자신이라도 자살이든 타살이든 사람이 죽은 학교를 계속 다니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6. 복도를 지나는 동안, 율곡과 유신은 앞서갔다. 시종일관 율곡에게 자신의 학교를 자랑하는 유신 때문에 기혁은 일부러 조금 천천히 걷는다. 2학년 때 유신의 담임이었다는 국어선생은 그런 기혁 옆에서 느긋하게 어깨를 같이 했다. 교무실은 2층이었고, 과학실은 4층 꼭대기였다. “저 녀석 잘 일하고 있죠?” 선생의 질문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기혁이다. 이유신이 일을 못한다고 는 보기 힘들다. 일은 잘하고, 또한 열심히 하지만 어딘가 신빙성이 없어 보일 뿐. “그런데, 이런 중요한 일에 유신이를 찾으신 이유가 뭡니까.” 처음 그들이 왔을 때부터 선생은 이 사건이 자살이니 타살이니 하는 이야기 를 하지 않았다. 그저 이 사건을 이야기 한다는 것 자체가 곤혹스러운 표정 으로 간략하게 설명했을 뿐이다. 그러니 이곳으로 저 가벼운 날라리 인간 이유신을 부른 이유가 자못 궁금하다. 이유신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게 벌써 8년전 일일텐데, 그 만큼 선생들에게 그의 존재가 각인이라도 되었던가? “유신이는...........” 복도에서 팔짝 팔짝 뛰어다니는 유신과 그를 말리려는 율곡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율곡은 그 와중에서도 몇 번 플래쉬를 터뜨리며 사진을 찍는다. 그 간 암울하고 어두웠던 학교 분위기였는지, 유신의 철없는 모습에도 선생은 미소지었다. “유신이는 학교 생활을 잘 했어요. 뛰어난 녀석이죠. 친구 녀석들과 잘 지내는 편이었고, 문제도 별로 없어요. 그래도 알아두는 게 좋아요. 저 녀석은.....“ “........?..........” “원래 국어나 영어 같은 문학 예술에 재능이 있었죠. 그런 녀석이 이과를 지망해서 수 년동안 과학을 공부한 건, 자기 자신에 대 한 문제에요.“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 기혁은 그 순간에 잠시 멈칫했다. 확실히 유신에게서 과학을 공부한, 아니 과학적으로 보이는 어떤 학자의 태도는 없어보였다. 6개월을 같이 일했지만 , 그 녀석 말마따나 둘이서 실수로 그 관계를 맺은 것 빼고는 이렇다 할 관 심이 없다. 그런데도 선생의 그 말은 왠지 모르게 기혁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의아한 듯 자신을 돌아보는 기혁을 향해, 선생은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체성.” “............” “그 녀석이 과학을 공부한 건 ...자기를 찾으려는 끊임없는 노력 때문이에 요.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실패했어요.” 그리고 그들은 목격자들이 기다리는 과학실에 도착했다. 7. 정확히 3명이었다. 기혁은 율곡이 노트북을 꺼내자 의자에 앉았다. 유신은 책상에 걸터앉아 다리를 건들거린다. 처음 시체를 발견한 3명의 고등학생들 은 조금 멍한 상태로 보였다. 넉살좋고 성격좋은 유신이 웃으며 가볍게 농 담을 건네기 전까지 그들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난 니들 선배거든. 그러니깐 긴장하지 말라구. 경찰도 아니고 의사도 아냐. 그냥 구라성 기사만 쓰는 기자일 뿐이지.“ “..............?” 녀석들 중 가는 머리카락을 가진 녀석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상당히 예쁘 장하게 생긴 얼굴이다. 그 반응에 유신이 씨익 크게 미소지었다. “잘 됐군! 뭔가 반응이 있다는 건 건전하다는 증거야. 너희들 GAS 알지, GAS ? 난 거기 연예부 기자라구. 니들이 뭘하고 사는지 다 알아. 항상 가방 안에 내가 쓴 기사들을 채우고 다닐 거야. 나도 너희 나이 때에 그랬거든..“ “....................?” “벌거벗은 여자들, 난잡한 기사들, 주로 내가 학교다닐 때는 썬데이 서울이 그 기사의 중심이었지. 너희들도 나와 같을 거야, 내 말이 맞지?“ 유신은 그 어린 고등학생에게 윙크를 했다. 당황한 학생이 어쩔 줄을 모르 며 목덜미까지 붉어진다. 기혁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유신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녀석은 언제나 의기양양하다. “인생은 기브 앤 테이크- 좋아, 하지만 난 기브 앤 데이트를 해 줄게. 가수 시아 알지, 시아? 니들 나이 때의 녀석들이 흠뻑 가는 그 여자 시아 말야. 스물 셋 정도 됐나, 시아양이? 그 여자를 만나게 해줄게, 어때?“ “............-!!!!!!!!!!!!” 기혁은 그를 노려보았다. 한 달 동안 아무 말도 없이 그 일을 꺼내지 않더 니, 지금은 마치 물 만난 물고기 마냥 신이 났다. 이를 악물며 노려봤지만, 유신은 웃는 눈동자로 지껄일 뿐이다. “자,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궁금해. 절대- 절대- 네버-!! 사실대로 기사 적지 않을게. 그리고 내가 알고 싶은 건 아주 아주 단순해. 누가 그 체육실에 안으로 잠그는 걸쇄를 채웠나 하는 문제야. .........일반적인 학교에는 안에서 잠그는 자물쇠가 필요없거든. 안에서 잠그는 게 필요한 일은 두 가지야. 집과 여관이지. 내가 생각하기론 그래. 누군가가.. ........필요해서 안으로 잠글 수 있게 만들었겠지. ......누군가가.. 안에서 뭔가를 했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아?“ 세 사람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율곡이 흥미롭다는 듯 노트북 자판기에 손 가락을 올린다. 사진만은 찍지 않겠다고 엄중하게 약속했기 때문에 세 녀석 을 찍을 수는 없었다. 기혁은 점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유신에게 이 녀석들의 입을 열게 만들 근거가 있는가에 대해. 혹은, 녀석이 어떤 이유로 그것을 확신하는가에 대 해. “정말 사실대로 밝히지 않을 건가요?” 그 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기혁과 율곡은 서로를 쳐다보았고 , 유신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인생의 90%가 농담과 거짓말이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아. 나는 거짓말하는 혀와 믿을 수 있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지. 내가 보기엔 너희들도 그래. 그러니 너희들이 설령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말한다 해도..“ “..............?” 녀석의 긴 속눈썹 끝이 살짝 떨린다. 숱 많은 속눈썹 사이로 아름다운 눈동 자가 반짝였다. “난 믿어. 누가 그 체육실을 안에서 잠그게 만들었는지만 말해주면 돼.” 갑자기 열려진 창문으로 바람이 불었다. 8. 마침내 한 녀석이 부들거리는 손을 들었다. 할 말이 있다는 표현이다. 기혁 은 율곡의 모니터를 한번 쳐다본다. 율곡의 노트북이 고장 난 것 같다. 계 속해서 화면이 일그러진 채 나타났다. 하는 수 없이 기혁은 연필을 들며 단 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off the record- 레코드는 안 된다. 일부러 녹음 기를 들고 오지 않았다. “모두들 이름부터 말하고 시작해. 기사에는 나가지 않아.“ 훗- 이라고 옆에서 유신의 작은 비웃음이 들린다. 그리고는 혼잣말처럼 뭐 라고 중얼거렸다. ‘기혁이 선배는 기억력이 나빠’-라고. 입술을 깨물고 한번 더 노려보자, 그 험상궂은 눈길에도 아랑곳없이 ‘내가 틀린 말 했나요?’ 식으로 응시한다. 그 바람에 기분이 더욱 가라앉은 상 태로 고개 렸다. 손을 든 녀석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는 게 보인다. “제 이름은 오기수. 2학년 8반입니다.“ “반은 말하지 않아도 좋아.” 기혁의 사무적인 태도에 녀석이 잠시 구원을 바라듯 유신을 바라봤다. 유신 역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응원하듯 씩- 웃었다. 그러자 마 침내 오기수라는 녀석이 띄엄 띄엄 혀를 굴린다. “유신 선배님이 궁금해.........하시는.. ..그 체육 준비실의 체인은..“ “.............??” “죽은 태욱이가 만든 거예요. ........축구부 부장이었기 때문에 체육 선생님이 그 녀석을 절대적으로 믿 었거든요.“ “................-!!!!!!!!!!” 죽는 사람이 스스로 밀실을 만든다?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저절로 눈살 을 찌푸렸다. 그것은 늑대가 자신이 잡힐 덫을 스스로 만든다는 것처럼 이 상한 말이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침착한 강율곡이었다. “계속 해봐.” “........그러니깐.... 태욱이는 축구부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리더였고.. 선생님들도 그 녀석을 좋아했어요. 또....“ “...........??” “..사실 안에서 잠그는 열쇠가 있다고 해도 어차피 아무도 신경을 안 쓰고 ... 그런 건 망치랑 드라이버, 몇 개의 못과 자물쇠만 있으면 한 5분이면 할 수 있는 거니깐요. 대부분은 그게 거기 있는지도 몰라요. 우리는.. 체육시간에 필요한 걸 쓰고.. 밖에서 잠그고... 그것만 잘 지켜주면 돼요. 한달에 한번 청소를 해주고... 아무튼 태욱이 녀석이 그걸 만들었다고 해도 한 6개월 정도 전의 일인걸요. “ “청소를 한다구? 그럼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도 청소를 했단 말야?“ 갑자기 끼어드는 유신의 목소리에 조금 놀란 것 같다. 대답을 하던 녀석이 어리둥절한 눈길이었다. “네.. 태욱이가 죽기 적어도 일주일 전에 청소했었어요.“ “청소는 정기적으로 하니?” “..아뇨. 낙훈이나 태욱이가 시킬 때만요.“ 유신이 책상에서 일어섰다. 녀석은 뭔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헝클어진 머리 를 흔들며 커피를 집어 든다. 머그 컵 잔에 입술을 댄 채로 뭐라고 중얼거 렸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도대체 그 녀석이 죽을 이유라곤 그 문에 자물쇠를 건 것밖엔 없는데...“ 사실이 그랬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죽은 태욱이 인기 많고 호감가는 녀석이었다고 한다. 무릇 살인이란, 특히 의도된 살인이란 동기 부여가 정확해야 한다. 그러니 더욱 믿을 수 없다. ‘아무 문제가 없던 녀석’이 자살할 이유란 도대체 몇 개나 되는가. “그 녀석에게 아무 문제도 없었어?” 재차 확인하는 듯한 율곡의 질문에 셋 다 고개를 저었다. “아무 문제도 없었어요. 아무 문제도..“ “잘 생각해 봐. 녀석이 자살을 했다면 더욱 표가 나야했고, 녀석이 살해를 당했다고 해도 뭔가 표가 나야해.” 이제는 제법 입이 풀린 듯, 정확하게 이야기 하는 기수의 옆에서 누군가 조 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불안한 표정이 가시지 않은 그 녀석은 책상이 흔 들거릴 정도로 다리를 떨고 있었다. “한 가지 있어요.” 기수라는 녀석이 큰 어깨를 돌려 친구를 놀랍다는 듯 쳐다봤다. 어깨를 으 쓱하던 녀석은 ‘별 수 없잖아’라는 표정으로 그런 기수를 마주보았다. “그 한 가지라는 게 뭐지?” 녀석은 아직까지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그는 무척 불안하게 친구들과 기자 들을 번갈아 돌아본다. 그러나 기혁이 주의를 환기시키듯, 책상을 몇 번 두 들기자 이내 정색을 하며 진정되었다. “태욱이와 친한 녀석이 하나 있었는데...” “.........?” “4개월 전에 출석일수 부족으로 정학 당한 일이 있어요. 지금은 학교를 다니지만.. 태욱이가 죽은 이후로 다시 학교를 안 나오고 있어요.“ 기수가 옆에서 기가 차다는 듯 기침을 했다. 그렇긴 하다. 그 일은 태욱이 에게 관련된 일이 아니라, 그의 친구에게 일어난 일이니 자살이나 살인의 원인으로 부족하다. 그러나 유신은 기지개를 펴며 미소지었다. 밝은 봄빛같은 웃음으로 방금 입 을 연 녀석의 등을 두어번 때리며 칭찬한다. “잘 했어. 그 정도라도 충분해.“ 칭찬을 받은 녀석이 손가락을 매만지며 당황한 것 같았다. 기혁은 그 모습 에 유신을 비난하듯 눈썹을 밀어 올렸다. 물론, 그런다고 꿈쩍할 이유신이 아니다. “그거라도 말해주는 게 어디야. 자, 친구- 네 이름이 뭐지?“ “원..........원 귀우요....” “좋아, 잘 했어. 귀우. 이제 니들이 단체로 나에게 숨기는 게 뭔지를 말해줄래? 정신과 의사에게 하지 못한 말까지 해서 전부-“ 그 때쯤, 율곡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자신과 유신을 올려다보았다. 9. 녀석들도 입을 벌리고 유신을 응시했다. 6개의 검은 눈동자가 자신에게 쏠 리자, 그는 입술을 매만지며 한결 진지해진 표정으로 덧붙인다. “말했지? 난 니들이 말하는 걸 믿어. 가령- 귀우 니가 여자 귀신을 봤다고 말해도 믿고, 오기수 니가 저절로 닫히는 문을 봤다고 말해도 믿어. 그리고 이름을 말해주지 않은 이쁜이~ 그래, 너. 예를 들어 니가 욕실의 물이 핏빛으로 변했다고 말해도 난 믿어.“ “..........??”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어서 기혁은 혀를 찼다. 아무튼 저 장황한 껄떡 거림이란. 그러나 세 녀석은 아무 말 없이 초조하게 서로를 돌아보았고, 유 신은 그대로 과학실 안을 걸어가 서랍 하나를 열었다. 뭔가 부스럭거리며 찾던 그는 노랗게 생긴 길쭉한 물건 하나를 집어 들더니 벽에 걸린 몇 개의 전선과 함께 들고 왔다. “자, 잘 봐. 이 검은 전선을 여기에 꽂고.. 이 빨간 전선을 여기에 꽂고...“ 그는 자신이 들고 온 노란색 기계를 흔들며 말했다. “이건 Digital ammeter 그러니깐, 디지털 전류계이지. 수업 시간에 안 졸고 잘 배웠지? 전류는 저항 분에 전압이야. I=V/R 이지. 그리고 여기 보는 건 일명 빵판. 구멍이 뻥뻥 뚫려서 다이오드나 트랜지스 터, 그리고 저항 같은 걸 마구 꽂아서 회로를 꾸밀 수 있게 해주지.“ “잠깐만...” 드디어 참지 못하고 기혁이 손을 들어 그의 행동을 저지했다. 신이 나서 설 명하던 유신의 다갈색 눈동자가 자신을 향한다. “도대체 말하고 싶은 게 뭐야?” 답답한 말투에 유신이 잠시 눈동자를 굴렸다. 당신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하 나- 라는 표정이다. 그리고는 이내 방법을 떠올렸다는 듯, 밝게 미소지으며 자신과 학생들을 둘러본다. 율곡은 이 사태를 지켜보며 말없이 웃고 있었 다. “난 전자기장을 설명하고 싶은 거에요.” “전자기장?” “electronic field(전자기장) 말이에요. 예를 들어, 선배 몸에는 아주 아주 미소한 전류가 흐르죠. 사람의 몸도 이온이 움직이고 도체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에요. 전류라는 건 전기를 띈 입자- 라고 말하는 전하들의 흐름이고, 이온도 전하 중에 하나죠.“ “그래서?” 이번에는 보다 참을성 있게 들었다. 유신의 입술은 생기로 가득차 보인다. 그리고 녀석은 이상할 정도로 이 순간에 진지하게 다갈색 동공을 빛낸다. “중요한 건, 일정한 흐름을 만들어내는 전류의 움직임은, 항상 전자기장을 만들어내죠.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closed surface ..닫힌 표면의 전기장은 가우스라는 사람의 법칙으로 설명 가능해요. 즉 전기장을 면적으로 적분하면 전하량, 그러니깐 전류를 유도해 낼 수 있 다는 말이니깐.. 그건 거꾸로 이야기 하면, 전류를 면적으로 미분할 때...전기장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이죠. 또 한편으로 전자기장은 맥스웰 법칙으로 유기적인 관계에 묶여 있으니깐.. .전기장을 알면 자기장을....“ “......이유신.” 이를 갈게 만드는 인간이다. 가만히 보니, 녀석은 자신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다시금 심하게 노려보자, 그가 웃었다. “맞아요, 선배. 선배를 놀리고 있었던 거예요. 하지만 중요한 걸 말하고 싶었어요. 가령.. 예를 들어.. 물건들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고, 선배가 여자 귀신을 보고 그런 것들... “ “..도대체 무슨 말이냐니깐?..” 마침내 조금 언성을 높이자, 유신이 마침내 포기했다는 듯 방금 꺼내든 디 지털 측정기를 눈 앞에 들이댄다. “잘 봐요.” “..................??” “..내가 이 기계를 잘 봐요- 라고 말한다면, 그건 눈금을 제대로 보라는 말이에요. 이건 측정기니깐.” 그 때서야 기혁은 조금 분을 삭이며 허리를 굽혔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서 여러번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리고 깨달았다. “눈금들이 계속 움직이고 있어요. 단자도 하나 꽂혀 있지 않은 상태에서.. 뭔가가 계속해서 전자기장을 배출한다는 의미죠. 그것도 이 계기판이 흔들 릴 정도의 움직임으로...“ “............-!!!!!!!!!!” “어떻게 설명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내놓는 전류, 그러니깐 전자기장으로 이해할 수 없어요. 뭔가 꾸준히 강한 전류를 가진 물체가 이 방에서 또한 같은 운동방식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설명하는가- 라고 묻기도 전에 율곡이 탁- 하고 노트북을 덮 는다. 조용하고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내 노트북을 보고 있었던 거죠, 유신이 선배.” 율곡의 노트북이라면 기혁 자신도 아까부터 보고 있었다. 그러나 유신과 율 곡은 마치 암호라도 교환하는 것처럼 크게 웃는다. 아직도 반쯤 얼이 빠진 세 녀석의 등을 두들기며 유신은 보다 즐거운 듯 속삭였다. “니 노트북은 아까부터 심각한 산란(dispersion) 현상을 보였지. 모니터만 봐도 알아." 진작 말하는 거지만, 기혁은 과학이 정말 싫었다. 하다못해 도르래만 나와 도 그는 고등학교 시절 책을 덮었다. 그러나 자신이 아는 한 GAS에서 가장 별 볼일 없고 인기만 많은 인간 둘이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웃 는다. “디스펄션.” “알 수 없는 기운이 파동이나 입자선을 흐트러뜨리는 거지. 여기 알아듣지 못한 기혁이 선배를 위해서 친절하고 영리한 내가 해 줄 수 있는 설명은..“ 그래, 제발 설명을 해라, 설명을. “........우리 말고 뭔가가 있다는 거예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계속해서 움직이는 뭔가가. 우리를 노려보는 뭔가가.“ “...........-!!!!!!!” 물론 놀랄 틈도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말없이 앉아 있던 녀석이 벌떡 일어서며 의자를 쓰러뜨렸기 때문이다. 10. 아이들이 뛰쳐나갔기 때문에 남은 것은 기자들 밖에는 없었다. 기혁은 기가 찬 표정으로 수첩과 노트북을 챙기기 시작했고, 율곡은 알아볼 것이 있다 며 교무실로 내려갔다. 국어선생은 그들이 오기까지 교무실에서 기다린다고 했었다. 이제 둘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기혁은 쓴 표정으로 유신을 다 그쳤다. 그는 그 때 마침 과학실 서랍을 뒤적이며 몇 개의 손전등을 꺼내 건전지를 확인한다. 몇 가지 봉투들도 열어보더니 부지런히 주머니에 챙겼 다. “이게 무슨 짓이야.” 그러나 유신은 대답하지 않고 부지런히 과학실을 빠져나갔다. 계단을 다 내 려갈 때까지, 기혁은 목구멍에 넘실거리는 부아를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도 참을성은 깊은 자신이지만, 유독 유신에게만은 참기 힘들었다. 그가 지금 내려가는 장소가 문제의 지하실- 그러니깐 그 마음에 걸리는 장소라는 걸 알았을 때도 기혁은 여전히 갑갑해했다. “이유신.” 지하로 통하는 계단의 끄트머리에서 가까스로 유신의 팔꿈치를 잡아당긴다. 그렇게 급한 걸음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빠른 걸음이었다. 늘 유유자적한 이 녀석의 행태에 비하면 그래도 서두르는 기색이다. “설명을 좀 해줄래?” 보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조용히 묻자, 그 유쾌한 다갈색 눈동자가 잠시 눈 꺼풀을 깜빡인다. 그러나 어떤 설명도 명쾌하게 꺼내지 않았다. 그저 기혁 이 당연히 따라올 거라 믿는 것처럼 큰 걸음으로 지하 복도의 가장 안 쪽까 지 걸어간다. 물론, 내려오면서부터 친절하게 켜 놓은 복도의 불은 그나마 밝았다. 그러나 덜컹- 유신이 가장 마지막 문을 힘차게 열었을 때는 매우 어둡고 습한 기운만이 느껴졌을 뿐이다. “선배...” 그가 손전등을 던지자 무심결에 받았다. 자신으로써는 도저히 안으로 들어 갈 마음이 들지 않는데, 녀석은 천연덕스럽게 안 쪽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는 수첩에서 다시 몇 장의 사진을 꺼내들어 손전등을 비춘다. “우리가 이런다고 뭔가 달라지지 않아.” 문틈에 기댄 채로 기혁이 낮게 입을 연다. 그건 사실이다. GAS가 어떤 진실 을 말하든, 그건 사람들에게 하나의 가쉽꺼리다. 우리에게 무슨 대단한 기 자정신이나 열 띈 탐구욕이 있다면 모르지만, 이건 아무런 소득이 없다. “알아요. 하지만, 적어도 선배가 생각하듯이 있었던 일을 없게 할 수도 없 고, 이미 일어난 일을 기억나지 않는다고 발뺌할 수도 없어요.” 또 그 이야기다. 이런 간 졸이는 현장에서 말하기 힘든 그런 이야기. 기혁은 팔짱을 끼며 보 다 냉소적인 말투로 비아냥대기 시작했다. “난 발뺌하는 게 아냐, 이유신. 정말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아.“ 한참 사진을 들여다보던 유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뭔 가 생각 난 듯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마치 그 날 그 현 장에 자신도 있었다고 생각하는 듯, 천천히 같은 자리에서 360도를 돌아갔 다. 녀석이 비추는 손전등이 오래된 체육 도구실을 간간히 스쳐간다. “의자가 여기 있었어요, 그렇죠? 천정에는 구부러진 못이 몇 개 박혀 있네요..” 다시 손전등을 자신이 서 있는 시멘트 바닥 위로 내리며 그가 말했다. 시멘 트 위의 핏자국은 흐릿하지만 잘 남아 있었다. 문득 이 컴컴한 지하실에 늦 은 밤이 왔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유신과 자신의 목소리 외에는 아무 것 도 들리지 않는 공간- 조금 울리듯 퍼지는 목소리 하나에도 흠칫하게 만들 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기혁은 몸을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살아 있는 무언가와 가까이 하지 않는다면 정신이 멍해질 것 같았다. 유신이 그런 자신을 향해 씽긋 웃는다. 몇 미터 쯤 녀석과 가까워졌을 때, 갑자기 나무 문이 끼익- 작은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녀석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다. “녀석이 죽은 등 뒤로 매트리스 더미들, 그 옆에 뜀틀, 무수한 줄과 그물, 공들을 담은 바케스,........ 아무도 없는 공간, 안으로 잠긴 문, 죽은 사람이 설치한 열쇠, 죽은 사람만 의 발자국, 천정의 구부러진 못....그리고..........“ 뭔가 혼잣말로 계속 중얼거리던 녀석이 갑자기 자신을 향해 뒤 돌아본다. 그 눈동자에서 정말 오싹한 뭔가를 찾은 것은, 기혁이 손전등을 들었을 때 였다. 어둠이 지배하는 습기 찬 지하실- 이상한 것은 유신이었다. 유신은 밝게 잘생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손전등으로 자신을 비춘 것이다. 그 환 한 불빛에 본능적으로 손을 올린다. 얼굴을 손등으로 가리고 뭐라고 나무라 기 전에 빛이 살짝 움직였다. 유신이 손전등이 기혁의 얼굴을 비추다가 천 천히 그 어깨너머로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한참, 기혁이 얼굴을 가리던 손 을 내리며 의아한 듯 눈썹을 찌푸리자, 녀석은 자신의 어깨 너머를 손전등 으로 비추며 맑게 말했다. “그리고 또 죽은 여자 하나.” “..............-!!!!!!!!!!!!!!” 그 죽은 여자가 흡사 기혁의 등 뒤에 서 있는 것처럼 말이다. 11. “내가 여자도 아니고............” 기혁은 마른 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니가 그렇게 놀린다고 너한테 답싹 안길 것도 아니고.. 너를 덥썩 안을 것도 아니니깐 그만 해, 이유신.“ 이건 너무 치졸한 복수잖아- 라고 덧붙이며 메마르게 웃었다. 그러자 유신 은 선명한 눈동자로 미소짓는다. “누차 말하지만.. 진정해요, 선배. 그 여자는 죽었어요.“ “...........-!!!!!!!!!!” 이번에야 말로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자신은 겁이 많지 않지만, 이런 식으 로 구는 거 딱 질색이다. 보다 빠른 속도로 기혁은 머리카락을 격하게 쓸어 넘겼다. “좋아. 니 사이코 같은 정신으로 그럼 제대로 설명해봐. 그 여자가 왜 죽었는데? 그 여자는 누군데? 내 등 뒤에 여자가 있어? 무슨 표정으로? 아~ 입에 피를 뚝뚝 흘리고, 칼을 들고 서 있냐?“ “............??” “잘 하면 발도 없겠군, 그래. 그만 해, 이유신. 이제 정말 너 때문에 기분 나빠져.“ 그러자 유신은 손전등을 내려 다른 곳을 비추기 시작했다. 아직도 화가 난 듯한 기혁을 지나쳐서 그는 문 쪽으로 걸어간다. 문에 걸린 쇠사슬- 아마 현장을 발견할 때 끊어진 그 체인을 꼼꼼히 들여다보던 녀석이 주머니 안에 서 뭔가를 꺼냈다. 그리고는 또 한참 감감 무소식- “그건 뭐지?” 검은 가루 몇 개를 꺼내 문의 체인에 바르던 유신이 그때서야 자신을 돌아 보았다. 녀석의 손에 묻어있던 가루 중 일부분이 문에 붙어 있었다. 접착제 로 붙이기라도 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건 철가루에요. 선배가 고등학교 다닐 때 아마 까마득히 먼 기억으로 떠올릴 듯한 그런 실 험.. 자석을 두고 주변에 철가루를 뿌리면 모양을 만들던 실험.. 일종의 그런 테스트..“ 아까 녀석이 꺼냈던 알지 못할 지식들에 비하면 한결 수월하다. 알아듣는 듯한 표정을 짓자, 녀석은 조금 전보다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마, 국과수에서 먼저 알았겠지만.. 여기 체인 안 쪽에 있는 둥근 홈 보이죠?“ 끄덕. 눈이 있는 이상은 보인다. 손전등을 비추며 녀석이 가리키는 곳에는 체인의 고리를 걸 수 있는 마지막 둥근 홈이 파져 있다. 여기에 쇠사슬의 마지막 고리를 걸면 안에서 완전히 잠긴다. 그러니 처음 목격자들도 쇠톱으로 체인 을 끊어서 들어온 것이리라. “문제는....” 하아- 라고 짧게 한숨을 쉬며 녀석이 그 홈에 묻어 있는 철가루를 손가락으 로 몇 번 눌렀다. 그러나 철심가루는 그 자리에 달라붙은 채 유신에게로 오 지 않았다. “자석이네요.” “...............?” 어렴풋이 뭔가를 깨달았다. 밀실의 수수께끼. 누가 안으로 열쇠를 잠궜는가 하는 점 말이다. 유신도 마찬가지 시선으로 작게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문 바로 맞은편을 손전등으로 가리켰다. “누군가 죽기 일주일 전에 청소된 체육 준비실.. 선배도 알다시피, 학교 안의 모든 준비실들은 대체로 어지럽죠. 저 쪽에 있는 매트리스, 그물들, 무수한 줄들, 어디에 쓰는지도 모를 많은 나무 판자들과 스코어 보드, 농구공, 축구공, 몇 개의 링.....“ “....그래..” “누구라도 살인을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죠. 마음만 있다면 지문을 남기지 않고 몇 가지 트릭만 이용해서 이 방을 빠져 나갈 수도 있구요.“ “.....그...” 갑자기 기혁은 목이 잠겼다. 아까 유신이 놀릴 때는 그저 흠칫했을 뿐인데, 이번에는 정확히 한기가 느껴졌다. 그 오싹한 기분은 천천히 이마를 따라 서 턱을 스치며 목덜미로 내려왔다. 둘 다 문에 얼굴을 바싹 붙인 자세였기 때문에 기혁은 유신의 얼굴과 마주 닿을 듯한 거리다. 그 상태로 일순 눈 이 마주친 순간, 녀석이 달래듯 낮게 소곤거렸다. “괜찮아요.” “................” “그 여자는 죽었어요.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해치진 못해요.“ “..........-!!!!!!!!!!” 갑자기 온 몸이 죄이는 느낌이었다. 심장 박동수가 빨라지고, 숨이 꽉 차는 기분- 그리고 입 안이 바싹 마른다. 이유신의 눈동자는 적어도 진지했다. 그렇게 조용한 눈동자는 이전에 자신이 뺨을 때렸을 때 외에는 보지 못했다 . 제기랄- 이라고 짧게 속으로 신음이 나올 정도다. 유신은 거짓말 하는 게 아니었다. 그의 말마따나 자신의 말 중에 90%가 농담과 거짓말이라고 해도 , 이유신은 지금 나머지 10%의 진실을 말하고 있다. “그 여자는...........” 정말 유신의 눈동자가 자신의 등 뒤로 움직인다. 무언가를 관찰하는 것처럼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흩어가는 시선이다. 그리고 묘사를 하는 사람 특유 의 느릿 느릿한 목소리였다. “그 여자는 아쉽게도 다리가 있어요.” “..........-!!!!!!!!!!” “그리고 머리도 있어요. 눈동자도 있고, 정말 찐하게 노려보네요. 혹시 선배 때문에 죽은 여자 있어요?“ “......이..유...신...........” “혹시 아까부터 따라왔나??? 저런~. 선배 말처럼 입가에 피를 묻히진 않지만, 머리통의 절반이 깨져 있네요.” 뭐라고 중얼거리며 유신이 다리를 털었다. 무릎에 힘이 풀린 자신과는 달리 녀석은 제법 담담한 모습이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이런 종류의 일을 몇 번은 겪어본 그런 모습. 그 때서야 아까 선생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이유신은 자신의 ‘정체성’이 궁금해서 과학을 공부했다고 들었다. 정체성- 그 말을 사회학과였던 자신 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정체성- 일명, Identity 는 비단 성적인 것을 이야기 하는 것 이상이다. 그 것은 ‘정말 나는 누구인가’하는 문제를 의미한다. 뭔가가 머리 속에서 차 분하게 나열되었다가 가라앉았다. 아까부터 스믈 스믈 자신을 덮던 섬칫한 기분 대신에 훨씬 시원스러운 결론이 든다. “정말 귀신을 보는구나....그렇지?” “귀신?” 그러자 유신이 자신에게 손을 내밀며 웃었다. 아주 오랜만에 유신의 피부에 맞닿았다. 한달 전의 일 이후로 둘은 한번도 악수조차 한 일이 없다. “내가 귀신을 본다고 말하면, 선배는 날 정신분열증이라고 말할 걸요?” “...........?” “난 귀신을 보는 게 아니에요. 내가 보는 건,......” 녀석의 밝은 온기가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그제야 한결 숨쉬기 가벼워진 다. 마치 무거운 것을 어깨에 지고 있다가 누군가와 나눈 기분이었다. 이유 신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다니- 그런 건 정말 예상 밖이다. “내가 귀신을 보면 차라리 점쟁이나 무당이 됐겠죠. 나는 귀신을 보는 게 아니라...“ “...........” “떠나간 사람들이 남긴 흔적을 봐요.” “..........???” “........예를 들어, 저 여자 같은 경우에는 분노와 증오- 그런 과잉 에너 지들. 그러니깐 선배는 허상 아닌 허상을 보고 있는 거예요. 여자는 죽었고... 우리는 그 여자가 죽으면서 남겨놓은 가장 큰 에너지를 잔상으로 보고 있는 거죠. 가령.. 영화처럼 말이에요. 영화가 그렇잖아요? 사람의 시선은 영점 몇 초의 짧은 순간을 기억해요. 어 떤 일이 벌어지고 나서 그것이 눈동자를 거쳐서 뇌로 전달되기까지의 시간 을 말하죠. 그러니깐 영화라는 건, 정말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라, 무수하게 정 지된 화면들을 재빨리 돌리는 거예요. 한마디로 사람의 눈동자와 뇌 사이에서 일어나는 신호체계를 이용해서 실제 로 움직이는 것처럼 만들어내요 ” “............그래서?” 바싹 마른 입을 열었다. 유신은 콧잔등을 가볍게 찡그리며 웃었다. 다소 익 살스러운 표정이나 밝은 목소리가 섬뜩한 기분을 가라앉힌다. “그러니깐.. 저 여자는 실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남겨진 잔상이에요.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차원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누군가 영화를 돌 리는 것처럼요. 기왕이면 포르노 영화가 좋겠지만.. 아쉽지만 어쨌든 그래요. 선배 뒤에 있어요.“ “..........그럼 왜 내 뒤에 있지?” 녀석은 더욱 밝게 웃으며 자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선배가 마음에 들겠죠. 방사능이 몇 백년 후에도 계속 남겨지듯이,.. 사람이 가진 염원이나 엄청난 기운도 계속 남겨지죠. 에너지는 자신과 맞는 다른 에너지와 합쳐지기도 하고 모습이 변하기도 하 는데... ........어쨌든, 선배 말마따나 저 여자귀신은 선배가 마음에 들겠죠. 선배에게 자석처럼 당기는 극상의 에너지가 나오고 있거나...........“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이번에는 정말 이성을 차렸다. 원래 성격이 조금 차가운데다가 신랄했기 때 문에 이 정도 일에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그나마 조금 마음에 걸렸을 뿐이 다. 유신이 목 너머로 키득거리며 가볍게 웃었다. 어쨌든 이 녀석이 뭐라도 지껄여주니 만사 오케이다. “선배의 지금 표정이...” “............?” “..마치 내가 펠라를 했다고 말했을 때랑 같아요.” 기혁은 마침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여전히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 이다. 한심하다는 듯 피식거리며 노려보자, 그때서야 유신은 일어섰다. 녀 석은 성큼거리며 아까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똑바로 서서 입을 열었다. 조 금 전에 했던 귀신에 대한 말은 거짓말이라는 듯 무척 초연한 목소리였다. “암튼 그 여자 귀신은 잊어요, 선배. 선배는 망각이라는 걸 잘 이용하잖아요? 어쨌든 자, 봐요. 이 자리에 의자가 있었어요. 인기 많았던 학생이 하나 죽었고, 이상할 정도로 자기의 눈을 여러번 찌르고 마지막에 동맥을 그었죠. 사진을 보면....“ 바닥에 늘어뜨려 놓은 사진. 자신이 들어서며 흘려 놓은 사진 곁에 주저 앉 은 채 후레쉬를 비춘다. 기혁도 어쩔 수 없이 다가서며 허리를 굽혔다. 전 등 아래 드러나는 사진은 몇 번을 보아도 몸서리쳐진다. “사진에서 보면, 죽은 녀석이 찌른 눈 때문에 여러번 핏물이 얼굴을 흘러 내려요.” “..............?” “처음 찔렀을 때의 흔적, 그런 것들을 여러번 지울 수 있을만큼 흘러 내리 죠. 페인트를 여러번 덧칠하는 것처럼... 하지만, 가장 위에 덮은 핏물 아래를 유심히 보면..............“ 유신은 왼손으로 전등을 든 채, 사진을 쥔 오른손에서 엄지손가락을 움직였 다. 녀석이 집은 손가락 때문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과연 뭔가가 조금 달 랐다.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가장 아래쪽 핏자국은 살짝 번져 있 었다. “번져 있군.” “..........네. 분장을 하는 게 아니라면, 일부러 핏물을 번지게 할 필요 가 없지 않나요? 핏물로 세수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라는 식으로 다시 쳐다보자, 녀석은 말없이 후래시를 턱 아래 가져 다 놓으며 귀신처럼 헤헤거렸다. 말없이 노려보자, 벌떡 일어서며 이번에는 문 맞은 편에 놓여진 벽 쪽으로 이동한다. 그곳에는 먼지 풀풀 나는 매트 리스가 쌓여 있었다. 조금 과장스럽게 돌아보며 녀석은 후래쉬를 마이크처럼 쥐고 떠들어댄다. “매트릭스 위의 가는 선들- 그리고 사진 속의 시체. 문고리에 달려 있었던 자석, 천정에 있는 몇 개의 구부러진 못.. 그리고 여기에 있는 버스 손잡이 같은 링- 선배는 고등학교 과학 시간에 뭐가 제일 싫었어요? 지렛대? 도르래?“ “도르래.” “좋아요, 그럼............” 녀석은 손전등을 입에 물더니 먼지 쌓인 곳에서 링 몇 개를 꺼낸다. 그 상 태로 굉장히 진지한 얼굴로 링을 연결했다. “뭘 하는 거지?” “암벽등산 해 본 적 있어요?” 아니- 라고 짧게 고개를 흔들자, 녀석이 연결한 링을 흔들었다. “저도 해 본 적 없어요. 그래도 자일(Seil-등산에 이용되는 로프)을 이용하는 방법은 조금 알아요. 일단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어야 해요. 반드시 도르래와 같은 원리는 아니지만, 도르래에서 이용되는 것 중에 하나 가 '고정 도르래‘는 힘점을 바꿔줘요. 힘의 방향을 바꿔주는 거죠. 두 가지를 이용하면 이런 결과가 나와요. 선배도 많이 봤겠지만..........“ “............-!!!!!!!!!” 녀석이 로프 하나를 들어서 좍 잡아 당겼다. 그리고는 카우보이처럼 줄을 빙빙 돌리더니 천정의 구부러진 못을 향해 던졌다. 촥- 하고 감기는 소리가 나며 줄이 못에 걸리며 늘어진다. 유신이 그 늘어져 내린 한 쪽을 잡고 다 른 한 쪽과 함께 겹쳤다. 그대로 그는 줄을 잡은 채 입구까지 걸어갔다. 체 육준비실 앞에는 긴 복도가 있어서 그가 조금 더 복도로 발걸음치자 줄은 팽팽하게 당겨지며 완만한 경사를 이룬다. 순간, 기혁은 깨달았다. 누군가 가 여기에 있었다는 사실과 그가 저 줄을 이용해 밖으로 나갔다는 것을. “아무래도 그렇죠? 내가 생각하는 걸 선배도 생각하는거죠?” 유신이 살며시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 끄덕였다. “일단 누구든지 의자를 가져다 놓을 거예요. 그 다음에 저 천정의 구부러진 못을 이용해서 로프를 연결하고 그걸 입구까 지 내려 놓을 수 있어요. 아마 희생자가 살아 있을 때, 누군가가 여기서 떨어진 곳에서 그를 공격했 을테고...... 뒤에서 끌어안고 칼로 눈을 찌른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한 쪽을 찌르던 두 쪽을 찌르던, 공격 받는 쪽은 정신이 없을테니깐.... 어쨌든 몇 번을 찌르던지 상관없을 거예요. 어차피 여러번 찌를 생각이었을 테니.....“ “.........그리고 나서 얼굴에 비닐을 씌웠겠지. 그게 얼굴에 남아 있는 문질러진 흔적이고..........“ 차차 모든 것이 선명해진다. 곤혹스러운 듯 기혁은 얼굴을 훔쳤다. 천천히 눈 앞에서 영상이 하나 흘러가는 기분이다. “얼굴에 비닐을 씌워야 핏방울이 떨어지지 않았을 거고.. 그 상태로 누군가 업고 여기에 들어왔을 거예요. 이미 기절한 녀석의 신발을 대신 신고 들어와서, 재빨리 비닐을 벗긴 다음 에, 다시 여러번 찌르는 거죠.“ “........처음 찔렀던 흔적을 감추기 위해?” “........그것도 이유 중에 하나겠지만.. 처음 율곡이가 했던 말이 맞을 것 같아요. 보지 말아야할 어떤 것을 보았던 댓가- 값비싼 복수...“ 기혁은 어이가 없어졌다. 그리고는 천정을 비추어 박혀 있는 구부러진 못을 확인했다. “실신했건 안 했건 여러번 공격당한 태욱이는.. 거기다가 앞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저항하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녀석의 죽은 사진을 보면, 어깨 춤에서 간간히 뿌려진 모양이 핏방울이 보 이는데.. 아마도 처음에 고개를 흔들며 저항했기 때문에 남겨진 것 같아요. 이미 녀석은 죽기 직전에 의식을 잃었을테구요.“ “어차피 많은 피가 흐르면 감춰지는 자국이지.. 아...아... 그래서.. 그래서 누군가가 녀석의 눈을 찌르고, 같은 칼로 손목을 여러 번 그은 다음 에... ...저 못을 이용해서 밖으로 나갔다..이거지?“ “오키!” 천천히 다시 눈 앞에 그 날의 살인자가 떠오른다. 검은 살인자는 태욱의 손 목을 힘차게 긋고, 미리 준비해둔 위 쪽의 줄을 쳐다보았다. 핏자국이 흥건 하게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그 어두운 밤에, 범인은 줄 위에 달아놓은 링을 양쪽으로 쥐고 줄의 경사면을 따라 안전하게 문 밖으로 내려갈 수 있다. 바 닥에 발자국 하나 없이 그대로 유격 훈련을 받듯 링으로 미끄러져 내려서 건너편에 착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줄은? 처음에 발견되었을 때, 줄이 있어야 하잖아?“ 갑자기 사고가 벽에 부딪쳤다. 유신이 눈을 깜박이며 대답하기 전까지. “그래서 암벽등산 이야기를 한 거예요. 누가 죽였든..그 사람은 못에 줄을 고정한 게 아니라.. 긴 줄을 접어서 그 고리에 못에 걸었어요. 줄을 이렇게...묶지 않고 접기만 해도 못에 걸고 양쪽으로 잡아당기면 되니 깐.. 그러니깐.. 저 문 바깥쪽 복도에서 그 줄을 잡고 팽팽하게 늘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죠. 아마 허리에 감고 버티며 천천히 줄을 타고 하강하지 않았을까요? 범인이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복도에 내려앉으면 나머지 공범이 자신의 허 리에 감겨져 있던 줄을 재빨리 당기면 돼요. 이 창고는 의자와 입구까지의 거리가 그렇게 긴 편이 아니라서.. 재빨리 줄을 당기면 바닥에 닿지 않고 순간 가속도에 의해 입구에서 떨어지 죠. 그리고 나서 문 바깥에서 문틈으로 체인을 살짝 잡아 당기고 자석에 가져다 댄다....그러면 철컥- 자석이 붙겠죠.. 붙은 자석이야 나중에 사람들이 시체를 발견하고 호들갑 떨 때 떼어가면 그 만이고... “ “.........그럼.. ........누가 죽였지?...“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그거다. 한번도 진실에 목말라한 적 없는 무덤덤 한 자신인데도 이 순간만큼은 심하게 갈증이 났다. 뚫어지게 녀석을 쳐다보 자 유신은 오리처럼 입을 내밀며 웃었다. “아까 기수라는 녀석의 말... 기억해요?“ “.................??” “..청소를 했다고 했잖아요. 우리에게 마치 태욱이 자살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고 발자국을 남겨야 하 는 인간.. 하지만 그렇다고 범행 하루 전날에 유별난 행동을 하지 않을 정도로 치밀한 녀석.. 그러니깐, 태욱의 발자국이 여기에 남고, 자신의 흔적은 남지 않을 정도의 먼지만 있으면 돼요. 먼지가 너무 많이 남으면, 태욱을 업고 여기에 들어온 무게감이 발자국에 남을테니 그건 안 됐을테고... 축구화로 살짝 찍어줄 정도의 발자국만 남기면 돼요. 그러니 딱 일주일 전에 청소를 해야 했던 거 아닐까요?“ “.....음.. 낙훈이라는 녀석이 남는군. 태욱이라는 녀석과 낙훈이라는 녀석이 청소를 시킨다고 했으니깐....“ 그러자 유신이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다. “아뇨........제 생각에는................ 그렇게 생각하기에도 뭔가 찝찝해요... 예를 들면.... 왜 아무도 그 순간에 재빠르게 119를 부르지 않았나 하는 것들.. 물론 너무 놀래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라고 말해도 납득은 되지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기절한 녀석이 사실은 꽤나 무겁다는 것... 그럼에도 죽은 녀석에게서 흔들리는 핏자국이나 저항하는 다른 흔적이 별로 없었다는 것.. 아니,..사실은 그 발자국이 너무나 조용해서.... 마치...........” 벌컥- 그 때 갑자기 문이 힘차게 열렸다. 12. 소스라치게 놀라는 표정의 두 사람과 어리둥절한 율곡 때문에 잠시 정적이 흐른다. 기혁은 몇 번 기침을 콜록이며 율곡을 향해 나무라듯 입을 열었다. “야, 임마-! 문을 열려면 노크를 해야지!!...“ “하지만 열려있는 문인걸요?” 큰 키를 접으며 율곡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괜히 유신과 꼭 붙어 있던 기혁이 머쓱해진 표정으로 재빨리 발걸음을 옮긴다. 둘만 있을 때보다는 훨씬 심장이 안정되었다. 더군다나 율곡은 혼자가 아니었다. 목격자인 세 명의 학생 중에 유일하게 입을 열지 않았던 녀석. 그 녀석이 율곡 뒤에서 주춤거리며 이 쪽을 들여다본다. “어서 와.” 유신이 청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꽂으며 환하게 웃었다. 버릇처럼, 아직도 주저하는 그 남학생을 향해 친절하게 손짓을 한다. 그럼에도 비틀린 녀석의 미소는 이상하게 묘했다. 마치 부글 거리는 분노를 애써 눌러담으며 태연 해 하는 모습이다. “니가 설명하고 싶은 게 그거겠지? 살인은 처음부터 없었다...라고.“ 갑자기 꺼낸 유신의 말의 기혁은 숨이 멈췄다. 문 밖에서 아직도 들어오지 못하는 녀석은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헐떡거리는 숨소리와 하얗게 질린 표정이 사뭇 질린 기색이었다. 그러나 유신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기 가 막힌 듯 녀석을 가리킨다. “하지만 니들은 그 녀석이 죽어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 이번에는 기혁과 나머지 하나가 경악으로 눈을 크게 뜨며 헉- 하고 명치를 어루만졌다. “내가 무슨 결론에 도달했는지 말해줄까? 니 이름이 뭐지, 꼬맹아?“ “......표.... ...표낙현................요..“ 낙현이라는 녀석은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반면에 유신은 고개를 저 으며 손을 크게 뻗었다. 마치, 이 공간에서 있었던 일 전부를 안다는 듯. “그래, 니가 낙현이군... 어쨌든 말야.... 죽인 것도 너희들이고, 남긴 것도 너희들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친구 아니었나? 아니면 죽은 여자 때문에? 태욱이가 6개월 전에 이 열쇠를 만든 이유 때문에?“ “..........-!!!!!!!!!!” “난... ..난 경찰이 아냐. 과학자도 아냐.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연예기사만을 쓰지. 그래도 한 가지는 알아.“ “............유신아?” “...태욱이는 죽어가고 있었고, 니들은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 유신의 말에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였다. 바로 낙현이라는 녀석이 마침내 말 문을 연 것이다. 그것도 뒤로 몇 발자국이나 물러서며 갈라지는 듯한 목소 리로. “내가 그런 게 아냐....” “.............” “...내가 그런 게 아냐!!!!!.. 태욱이가 한 거라구.. 태욱이가......한 거라구........“ 구석으로 몰려가는 기분이 들 정도다. 기혁은 단 걸음에 녀석에게 다가선다 . 그리고 똑똑히 보았다. 심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경련을 일으키듯 부들거 리는 몸, 핏발이 선채 허공을 향해 토해내는 절규. 찰싹- 하고 뺨을 후려치자, 낙현은 멍해진 표정이었다. 침착한 율곡이 손수 건을 꺼내든다. 가까이서보니 온 몸이 땀이다. 흠뻑 젖은 얼굴을 손수건으 로 몇 번 훔치자, 그 때서야 숨이 돌아온 듯 길게 공기를 토했다. 녀석은 그 바닥에 주저앉아 넋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13. “저 열쇠는 태욱이가 만든 게 아니라.... 6개월 전에 기수가 달았어요.........” 낙현은 벌벌 떨면서 손가락으로 빈 체육 준비실을 가리켰다. “저 문에 체인을 만들었어요. 그 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하- 유신이 녀석을 노려보며 짧게 숨을 토한다. 결코 재미있어 하지 않는 표정이다. 오히려 알고 있었다는 듯 조금 비아냥거리는 음색이었다. “오기수.. 아까 가장 말 많았던 녀석이지. ..그 녀석이 달았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렇지 않다면 자기 말처럼 그런 체인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또 어떤 식으로 달았는지 아무도 신경 안 썼을 거야. 니들은 여기 공을 가지러 올 뿐이니깐.. 사람들은 자기가 했던 일은 비교적 잘 기억하지. 기수의 말처럼 그깟 자물쇠를 다는 거라면... 그걸 달았던 녀석이 제대로 기억하겠지. 6개월 전인지, 5개월 전인지... 청소도 마찬가지고.......“ 반대로 낙현은 거의 울 것 같은 음성이었다. “기수가 ...달았어요.. 원래 목적은... ...기수가 자기 여자 친구를 놀려주기 위해서였는데............“ “.......잘들 한다..” “...그 여자애는 뛰어 내렸어요. 우리가............그애를...........“ 이유신이 자신의 입으로 이야기했다. 과잉된 에너지- 라고. 즉 과도한 정신 의 상태. 컨트롤 되지 않는 어떤 것이 빚어낸 살인(殺人). "우리가 그 애를... ..골대로 삼았거든요.. 여기에 기수, 태욱이, 귀우, 그리고 하경이와 저... 이렇게 다섯 명이 모여서.. 그 날은 우리가 처음으로 옆 학교를 이긴 날이었는데, 다들 여기 숨어서 술 을 마셨......어요.“ 자신의 피를 제어하지 못하는 어떤 수컷들. 그리고 컨트롤 되지 않는 나이 와 깊어진 밤의 기운- 밖에서 열 수 없는 문. 그들만의 비밀. “처음에는 여자애를 묶어 놓고 골대로 삼았을 뿐인데.. 사람을 세워놓고 그 안에 빈 맥주병을 던지는........ 그런...게임요... 점점 과도해지자 다들 정신이 나갔어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기수가 여자애를 억지로 강간했고..“ “..............” 몹시 화가 난 듯, 유신이 등을 돌렸다. 어찌할 바를 모르며 연신 머리카락 을 쥐었다 놓는다. 기혁 역시 참담한 눈길로 낙훈을 노려보았다. 울음을 터 뜨리는 녀석은 그러나 비교적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그것만이 아니라.. 태욱이에게 시켰어요.“ “..........친구를 범하라구..그렇지?” 유신의 날카로운 한마디에 낙훈이 고개를 푹 숙였다. 기혁은 눈앞의 이 녀 석을 정말 패주고 싶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악질같은 녀석들을 처음 만난다 . 가장 침착했던 것은 역시 율곡이었다. 녀석은 계단 아래 쪽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었는데, 분노가 이글거리는 시선이었지만 차분하게 입을 열 었다. “축구에는 골대가 두 개 필요하지. 니들이 저 좁은 공간에서 진짜 축구가 아니라, 사람을 세워놓고... 빈 맥주병을 던졌다해도.. 어쨌든 희생당해야 하는 건 두 사람이야. 하나는 기수라는 녀석이 건드린 여학생이고.. 나머지 하나는...........“ “...태욱이의 가장 친한 친구 하경이요...” 아까 귀우라는 녀석이 말했었다. 죽은 태욱이의 가장 친한 친구가 4개월 전 에 무단결석을 했다고. “오기수가 태욱이에게 그 녀석을 안으라고 한거구나..그렇지? 자기가 여자친구를 억지로 안았듯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낙훈에게 율곡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기혁 은 율곡이 저렇게 필요이상으로 부드러운 이유가 매우 화가 났기 때문이라 는 걸 잘 알았다. GAS 내에서 가장 어리지만, 가장 알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율곡이었다. 마침내 그 서늘하고 조용한 말에 낙훈이 눈물을 쏟았다. 덩치가 그렇게 큰 녀석이 주저앉아 오열하는 듯한 태도에 기혁은 설명할 수 없을만큼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왜-...라고 묻고 싶었다.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내부 에서 이글 이글 거리는 바람에 기혁은 벽이라도 한대 때리고 싶었다. 물론,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했다. 쿵-하는 커다란 소리에 울던 녀석이 흠칫 고개를 든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 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해 보였다. “하경이는... 축구부에서 가장 사랑받는..녀석이었거든요... 기수는 그런 하경이가 못마땅했고.... 자신보다 인정받는 태욱이도 못마땅했고....“ “하지만 태욱이랑 하경이는 친구였어! 설사 니들이 다 미쳐서 아무도 그 상황을 빠져나갈 수 없었어도.. 적어도 누군가는 그걸 말렸어야 했어!!“ 문제는 아무도 유신이 소리치는 것처럼 하지 않았다는데 있었다. “그렇지만............” 낙훈이 유신을 향해 어지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선배가 모르는..........그런 게 있었다구요! 어차피 그 순간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여자애는 이미 기절해서 널브러져 있고... 모두가 그 순간에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다..........“ “공범자 의식이군.. 강간을 한 개자식이나 그걸 부추기고 지켜본 녀석들이나 모두 다 범죄자지. 공범자들은 서로의 입을 막아야 하고.. ........결국 서로를 단속할 다른 일이 필요했던 거냐... 아무도 그 일을 발설하지 못하게.. 이 개새끼들...........“ 율곡이 드디어 이를 갈았다. 낙훈은 눈가를 가리며 간간히 흐느낀다. 이제 열 여덟. 그의 인생은 이미 4개월 전부터 끝나가고 있었다. “근데 왜 ....태욱이가 죽었지.. 만약 하경이가 범인이라면,... 기수를 죽였어야 하는 거 아닌가...“ 기혁의 중얼거림에 낙훈이 입을 열었다. “.......일단은 여자애가 뛰어 내렸어요 우리는 그날 기절해 있는 그애를 놔두고 모두가 돌아갔고... 여자애는 일주일 쯤 뒤에 자기네 아파트에서..뛰어내렸어요. 머리가 터져서 즉사했죠. 그 쯤에야 다들 그 날.......우리가 환각을 본 게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은 그 다음날부터 다들 멍해 있었거든요. 아침에 일어나서... 서로의 얼굴을 보고, 우리가 단체로 악몽을 꾼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하지만, 여자애는 죽었고... ......우리는 우리가 한 짓이 뭔지를 처음 깨달았어요..“ “.....그래서?” “...그리고 조금씩 이상한 일을 겪기 시작했어...요. 아까 .. 유신이 선배가 말했던 그런 거.. 어른들이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그런 것들...............“ 낙훈은 흡사 미친 것 같았다. 과도하게 오바하지도 않았지만, 점점 울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수는........ CD 도 없는 CDP에서 노래를 듣고.... 귀우는... 계속해서 귓전을 때리는 물방울 소리를 들었어요.. 녀석은 좀 미친 것처럼 비가 계속 온다고 중얼거렸..거든요. 저는 잘 때마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기분에 눈을 뜨곤 했어요. 어떤 날은 우리가 축구공을 잡을 때마다 피묻은 손자국이 찍혀 있었어요. 죽은 태욱이만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태욱이를 죽인거냐? 너희들의 죄책감을 덮어씌우게? 그것도 복수냐?“ 기혁이 특유의 신랄한 미소를 지으며 조소를 보낸다. 그러자 낙훈이 단호하 게 고개 저었다. 녀석의 쓰린 표정과 후회하는 눈빛은 그 순간만큼은 진심 으로 느껴졌다. “아뇨... 우린 안 죽였어요..” “그럼..........?” “태욱이가 죽기........이주일 전 밤이었는데.. 밤 늦게 저와 귀우가 내려왔을 때, 안에서 소리가 들렸어요. 하경이와 태욱이가 다투는 소리.. 그 일 이후로 한번도 둘이 이야기하는 걸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귀우와 저는 몰래 문 밖에서 듣고 있었거든요...“ 14. 18세의 표낙훈과 원귀우는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적어도 몇 개월 전에 있었던 그 짐승같은 시간은 잊었다 할지라도- 창고 안에서 으슥한 밤에 싸 움을 벌인 두 친구, 죽은 강태욱과 차하경은 서로 다투고 있었다. “서로 싸우고 있었어요.. 아니, 주로.. 하경이가 말을 했어요. 내가 이런 저런 식으로 너를 죽이려고 했다...라고....“ “............-!!!!!!!!!!” “천정에 못질을 하고, 로프를 메어서 실험해보고... 의자와 발자국, 그리고 언제쯤 청소를 해야 먼지가 쌓이는지... 또 문에 자석을 이용해서 고리를 거는 방법까지.. 전부 하경이가 생각한 거예요.“ 살인계획은 차하경에게서 나왔다. 그러나 하경은 자신이 죽이려고 했던 태 욱에게 그것을 미리 설명했다. 말도 안 된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 없다는 이야기와 같았다. “하경이가 그걸 왜 설명했지? 태욱이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말야...“ 기혁의 궁금증은 유신이 물었다. 낙훈은 그 질문에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녀석이 입을 연 것은 몇 초가 흐른 뒤였다. “.......저와 귀우가 들은 말은.........” “.................?” “....하경이가 그걸 계획하는 동안 이미 마음이 풀렸다는 사실이에요. 우리들..모두를 죽인 것과 다름없다- 라고 말했어요. 심적살인.... 몇 번이나 계획해서 몇 번이나 마음 속으로....태욱이를 죽였으니깐,.. 이제 자신은 괜찮다..라는 식으로.........“ “.................” 짧게 한숨을 쉬며 낙훈이 쓰게 웃었다. 18세가 지을 수 없는 미소였기 때문 에 기혁은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다. “우리가 몰랐던 것은..........” 낙훈이 길게 한숨쉬었다. 유신은 여전히 주먹을 꽉 쥔 채 분노를 삼키는 모 습이었다. 그런 선배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며 18세가 덧붙인다. “우리가 몰랐던 것은............. 둘이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 “태욱이가 하경이를 더 좋아했는지도 모르죠.. .......그 날 하경이가 외쳤으니깐... ‘니가 오기수를 부추긴거야!!!!...... 너는 나를 가지기 위한 변명이 필요했어!!!’ 라고.“ 아마 그 말을 들었을 귀우와 낙훈의 표정도 지금의 이들과 닮았을 것이다. 감정 표현을 그렇게 아끼던 율곡이 눈썹을 움직였다. 기혁은 갑자기 누군가 가 몽둥이로 자신의 뒷통수를 때린 것 같았다. 낙훈은 씁쓸한 눈빛이었다. “기수는 단순한 놈이에요. 경쟁심 강하고... 이기적이고.. 그 맥주병 던지는 게임도 사실은 태욱이가 제안한 거지만... 기수가 가장 날뛰었기 때문에 모두가 기수만 기억하고 있죠..“ “........문고리에 자물쇠를 건 것도....” 이런 곤혹스러운 기분도 처음이다. 기혁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길게 한숨만 쉬었다. 태욱이 왜 죽었는지 알 것 같았다. 처음부터 태욱이 기수를 부추 기고 범죄가 저질러지도록 만들었다. 낙훈과 귀우도 그 날 그 외침 때문에 사실을 깨달은 것이리라. “처음부터 문고리에 자물쇠를 채우도록 시킨 것도 태욱이었어요. 기수는 시키는대로 했죠. 그래서 아까 기수는 태욱이가 한 것이다- 라고 말한 거예요. 태욱이는 자신의 목적만을 생각한 거죠.. 하경이를 안고 싶었다- 내 것으로 하고 싶다..라는 단순한 욕망...“ “.........모두를 이용해서.. 전부를 이용해서..“ “네.. 하경이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자신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가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거예요. 그러면서도 누구에게도 그걸 들키지 않게 치밀하게 만들었어요. .......하경이는... 그런 태욱이의 잔인함이나... 이기적인 방식이라 하더라도.. 나름대로 애증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죽일 계획만 세웠을 뿐, 죽이진 않은 거군...” 다시 문제가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럼 하경이가 아니라면 누가 죽인거지.. 그리고 아까 유신이 외쳤던 말은 무슨 의미지..‘살인은 처음부터 없었어. 니들은 다만 죽어가는 녀석을 보고만 있었지..’라고. 기혁이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유신을 바라보자, 낙훈이 침을 삼켰다. 칼칼하 게 갈라진 목소리로 녀석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소곤거렸다. 너무나 작아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다. “.........태욱이는 자살한 게 맞아요.. 제가 보고 있었으니깐요.. 저도, 기수도,..........그리고 귀우도. 아마도 하경이가 보고 있었다면 말렸겠죠... 태욱이는 하경이가 시킨대로 죽은 거니깐..........“ “............-!!!!!!!!” 역시, 의문이 남는다. ‘하지만 왜?’ 라는- 그 이기적인 태욱이라는 녀석 이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가 하는 문제는. “형들이 몰라서 그래요...” 낙훈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어떤 말 한마디 를 겨우 입 밖으로 낼 수 있었다. 그 날- 이 지하실에서 하경과 태욱이 싸 우던 날. 바로 그 시간에 왜 하경이 태욱을 용서했는지를. 그리고 태욱이 왜 그렇게 죽었는지를. “..형들은 정말 몰라요. 태욱이가 그 날 하경이한테 그랬거든요.. 녀석은 하경이가 길길이 날 뛸 때까지 아무 말도 없다가.. 처음으로 그렇게 말했어요.“ “................” “...차하경.. 나는 그 날부터 니가 그 여자로 보여....라고. 처음 너를 안았을 때부터 너는 그 여자로 보였어...........라고.“ “.........-!!!!!!!!” 숨이 멈춘다. 잠깐의 시간이 지하실에서 멈췄다. “태욱이는 우리에게 거짓말 하고 있었어요. .........아니, 거짓말은 아니었겠죠.. 적어도 ... 우리가 죽은 그 여자애를 느끼는 그런 현상을 겪고 있었다면.. 태욱이는 지가 그렇게 갖고 싶었던 하경이를 볼 때마다... 그 여자애를 직접 보고 있는 거니깐... ..그거야 말로 그 정신 나간 녀석에게는.. 견디기 힘든 일이라는 걸 우리도 그 날 알았으니깐..........“ 15. 한달 전 어느 새벽. 아직은 어두운 6시 30분. 등교한 학생이 거의 없는 시간에 세 사람의 축구부원이 지하실 계단을 내려 갔다. 셋 중 누군가가 발걸음을 멈추었을 때, 그들은 얼굴을 마주보았다. 아주 짧게 휙- 하고 휘파람 소리마냥 바람이 스쳐갔다. 가장 아래쪽 계단까 지 내려간 귀우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보다 한 계단 위에 있던 낙훈이 기수의 어깨를 붙잡았다. “야.............” 기수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들 중에 가장 큰 소리로 별 볼일 없는 이 야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마구 떠드는 친구의 눈빛은 그러나 생생한 공포 로 젖어있었다. 그들에게는 모두 연기가 필요했다. 적어도 경찰이 달려오고 , 누군가 어른들이 나타날 때까지 쭉 이어갈 어떤 연기. 기수의 눈에도, 낙훈의 귀에도, 그리고 앞서 걷던 귀우의 피부에도 느껴질 정도의 한기다. 사락 사락- 어두운 복도끝으로 사라지는 발자국과 희미한 여자아이의 머리카락들. 이를 악문 채, 터져 나오는 비명을 숨죽이며 기우 는 중얼거렸다. “왜??”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낙훈이 그런 복도 끝에 시선을 박은 채 약속한 듯 대답했다. “뭔가..................이상하지 않아?” 그리고 복도를 거슬러 오는 듯한, 희미한 피냄새. 암흑같은 그 비린내. 구 토기를 연신 참으며 귀우가 뒤 돌아본다. 기수는 이를 악물고 그 말을 되받 아쳤다. “...........웃기고 있네, 자식..” 가까스로 창고 앞까지 걸어갔을 때, 희미한 조명 아래의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귀우는 정말 토할 것처럼 몇 발자국 물러섰다. 부들 부들 떨리는 손으로 문을 몇 번이나 덜컹거리며 낙훈이 속삭였다. “........이상해......... 문이 잠겨 있어...“ 그들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안에서 죽어 간다는 사실을. 그리고 더 망설였다. 막상 술이 덜 깬 수위 아저씨가 나타나서 흥얼거리며 쇠톱질 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덜컹- 어두운 공간이 열리고, 얼이 빠진 수위 아저씨가 뒷걸음을 친다. 낙 훈은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어두운 공간. 마치 이 살인의 잔치처럼 일 주일 전에 그들이 청소해 놓은 공간 아래로 친구가 앉아 있었다. 칼날로 헤 집어진 얼굴, 그럼에도 너무나 조용한 발자국, 들리지 않는 비명과 소름끼 치는 살기. 그들은 간신히 서로를 지탱하며 울음을 삼켰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 태욱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아무도 구급차를 부르지 않았다. 죽 어가는 친구의 곁에 가만히 자신들을 노려보는 그 여자. 그 여자는 진작에 세상에 없는 얼굴이었으나, 그 때만은 또렷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16.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유신과 기혁은 부장에게 계속 깨졌다. 특종을 잡아 오지 못한 그들에게 부장의 침튀기는 다혈질 공격은 계속된다. 그러나 율곡 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 자리를 비켜났고, 다시 밤샘 기사 정리에 열을 올리 며 기혁과 유신은 빈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한 번 만나줘요, 울랄랄라~~” 유리 너머로 노래를 부르며 자판을 두들기는 유신이 보였다. 기혁은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를 심정이었다. 아까 차를 운전하면서 올 때부터 계속 그랬다. 결국은 자살이 맞았다. 유신은 씩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 ‘가끔 정부에서 말하는 걸 믿어야 할 때도 있어. 속이 쓰리지만..’ 이 라고. 투두둑- 새벽 3시를 기점으로 해서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연신 울랄 랄라를 노래하던 녀석이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오랜만에 조용해 진 얼굴로 창 밖을 내다보았다. “정말 자살이었어...그렇지?” 견딜 수 없어진 기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유신에게 다가섰다. 유신은 그런 자신을 한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 물을 올렸다. 자글 자글 거 리며 커피포트가 소리를 낸다. “예전에 사회학 수업 시간에 듣기를...” “...............?” 기혁은 따뜻한 머그 잔을 받으며 중얼거렸다. 문득 뭔가가 떠오른 것이다. “사회에는 둘 중 하나를 개방해야 평화롭게 흘러간다고 했지.” “........뭘 개방해야 하는데요?” “성이나 폭력. 적어도 수컷들이 중심인 사회에서는.. 섹스나 폭력 둘 중 하나를 개방하면 에너지가 쌓이지 않고 흐른다고 보는 거지.“ 응- 이라고 나이트 부킹 1위를 자랑하는 유신이 살짝 웃었다. 정작 K 고등 학교와는 상관없는 기사를 적어야 하지만 기혁은 그래도 머리 속이 복잡했 다. 하룻밤 사이에 이상한 꿈을 꾸는 그런 기묘함- 마치 그 어린 녀석들이 그 날 지하실에서 느껴야 했던 기이한 감정에 전염된 기분이었다. 복잡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듯, 유신이 맑은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본다. 유리창에 머리를 기댄 녀석은 커피를 홀짝이며 편안하게 중얼거렸다. “성이나 폭력을 개방한다라.. 둘 다 개방하면 끝장이겠군요. 미국처럼 성과 폭력이 둘 다 개방되어도 문제고... 둘 다 개방되지 않아도 사람의 감정은 일그러지고....“ “......아까 그 녀석들은 ... 둘 다를 만났기 때문에 왜곡되었던 걸까. 사실.. 난 이해가 가지 않아.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어떻게 그렇게 잔인한 일들을..........“ 다소 머리를 흔들며 대구하자, 유신이 유리창에 입김을 호호 불며 외계인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 녀석은 어제 아침에도 외계인을 그렸었다. 다만, 유 신이 어제 그린 외계인과 오늘 그린 외계인이 자신의 눈에 달라 보일 뿐. “선배.” “..............?” “.....이해하지 못하는 일은 없어요. 이해는 되죠. 용서가 안 될 뿐이지..“ “...................” 뚜렷한 그 무엇. 가령 예를 들어서 태욱이 자살한 진짜 이유. 그것이 단지 여자애의 환영을 봤기 때문일까. 무심결에 질문하듯 시선을 던지자, 유신은 외계인을 좀 더 세밀하게 그리기 시작했다. “강태욱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기적인 녀석인 거 맞아요. 죽는 이유마저도 소름끼치게 이기적이죠. 자신이 안고 싶었던 건, 가지고 싶었던 건 친구 하경이었는데.. 막상 안는 순간엔 그게 그 여자로 보였죠.. 녀석은 계속 자신의 죄책감을 눌러 담고.. 환상과 환각에 시달리면서도 그걸 인정하지 못했을 정도로 이기적이예요. 가지고 싶은 게 유일하게 하경이었으니깐. 정말 가지고 싶어서 몇 개월이나 사람을 조종해서 가지게 되었는데..“ 막상 안아놓고 보니 그게 하경이 아니라 죽은 여자였다. 아니, 당시에는 죽 지 않았을테지만, 어쨌든 자신들이 파괴한 여학생이었다. “그러니 미치죠. 하경이를 보고 싶은데, 자꾸 다른 게 보여요. 애당초 그런 계획을 가졌었던 자신을 저주하고.. 그리고 아직도 아무 것도 해답없는 절망을 느끼고.. 눈을 찌르는 건.. 자기에 대한 속죄예요. 그건 귀신이 찌른 게 아니라.. 자기가 찌른 거니깐..........“ “다른 녀석들이 가만히 있었던 것도 이해가 가는군. 고대의 제사와 같은 건가.. 화가 난 여신에게 제물을 받친다.. 그것도 미쳐버려서 자기 발로 걸어간 그 제물을...“ 유신이 외계인 그리던 것을 멈추고 잠시 자신을 바라보았다. 금발의 가벼운 머리카락이 많이 헝클어져 있었다. 얼마나 머리를 쥐어뜯었는지, 단아한 이마선이 깨끗하게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말야...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유신의 셔츠를 다소 다급하게 잡자, 그가 비웃듯 쳐다본다. 언제나처럼 놀리는 눈빛이었지만, 기혁은 정색을 하고 되물었다 . “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건.. 왜 그 녀석이 하경이가 계획했던대로 죽었냐는거야. 깨끗하게 자살할 수도 있잖아? 왜 모든 사람을 그렇게 혼란스럽게 하는거지?“ “..........그게 그 녀석이 자살한 이유니깐..” 유신이 긴 손가락을 올려, 기혁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바로잡았다. 그 손 길에 놀라며 몸을 뒤로 빼자 조금 허탈한 미소를 짓는다. 갑자기 문득 미안 해졌다. 이유신에게 미안하다니- 오늘 일만 아니었다면 절대 없을 감정이다 . “선배,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 “........정말 모르니깐 묻는 거야. 난 솔직한 인간이야. 너처럼 말의 90%를 속이진 않는다구.“ “........선배...” 왠지 녀석의 시선이 서러워 보인다. 뭔가 희미하게 눈동자를 움직이며 찌푸 린 자신을 향해 쓰게 내뱉었다. “한 선배님... 강태욱이라는 녀석은.. 다른 사람들처럼 절망에 빠지거나 우울증이 있거나... 혹은 허탈해져서 죽은 게 아니에요.“ “................?” “....그 녀석은 하경이만 생각해요. 차하경요. 그 녀석은 하경이에게 알리기 위해 죽은 거예요. 그러니 하경이가 계획했던 대로 죽은 거죠. 치밀하게.. 몇 일동안이나 준비해서...“ “...........하경이에게 알린다구? 자기가 죽는 걸?” “..아뇨. 죽는 걸 알리는 게 아니라.. 나는 니 말을 듣고 있다, 차하경..이라는 메시지. 나는 언제나 니 말을 듣고 있다...라는 메시지. 내가 죽어서 라도 늘- “ 오싹- 다시 한기가 느껴졌다. 멍하니 쳐다보자 유신이 씽긋 웃으며 커피잔 을 들어올린다. “밀폐된 공간, 안으로 잠기는 비밀, 그리고 강간과 같은 잔인한 폭력, 언 제나 같이 생활하는 무리들, 수컷들의 말 안 되는 경쟁심리, 어리석은 두뇌 게임, 그들만의 공범의식, 엄습하는 밤, 축축한 습기, 오랜 시간 응집된 소유욕, ...... 그 정도면 미칠만 해요. 아이들은 억눌려 있고.. 억눌린 감정은 광기를 생산하죠..부글 부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사건들을 만들어내는 ...... .....“ 마른 입술 사이로 기혁은 숨을 뱉으며 혀를 씹는다. “난........이해가 안 돼.” 유신이 커피를 홀짝이며 가볍게 웃었다. 녀석은 피곤이 주렁 주렁한 눈꺼풀 을 겨우 밀어 올리며 자신의 자리로 간다. 자신과 그를 갈라놓는 두꺼운 유 리벽. 그 문에 피로한 등을 기대며 기혁은 따뜻한 커피를 위장에 부었다. “이유신.......아까 고등학교 선생님이........네가...” “..정체성을 고민한다구요?” 의자에 앉은 채,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유신이 되받아친다. 고개를 빼꼼이 뒤로 젖히는 행동에 기혁은 말할 수 없이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오슬 오슬한 기분과 마치 유신이 그 순간에 꼼짝없이 자신을 지배하는 듯한 그런 기분. “선배.. 내 정체성을 선배가 고맙게도 나눠서 고민하기 이전에.......” “.............?” “..선배 등 뒤의 여자나 털어내고 말해요.” 또 다시 화들짝- 그러나 곧 키득거리는 목소리 때문에 기혁은 이를 갈고 만 다. 방금은 정말 놀린 거다. 이유신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존재다. 어쨌든 하루가 지났다. 그만큼 마감일이 가까워진다는 말이다. 기혁은 잠이 찰랑거 리는 머리를 저으며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지금은 당분간 한 가지만 생각해야겠다. GAS- '마감일이라도 제 때 지켜라‘- 라고. 어쩌면 그가 이유신의 노트북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유 신은 이렇게 적고 있었던 것이다. ‘제기랄 놈의 한기혁. 언젠가는 너랑 자 고 말 거다’- 라고. <에피소드 1-조용한 발걸음 end> S <에피소드 2 - 마지막 인형> 0. 솜덩이가 손가락에 걸렸다. 여자는 가는 웃음을 연신 지으며 솜덩이를 만지 작거린다. 어둡게 켜 놓은 조명, 그리고 조금씩 헐떡이는 웃음소리, 차갑고 음산한 감도는 기운들. 그러나 정작 인형의 머리 위로 머리카락을 붙이며 여자는 흐린 미소를 신음 처럼 쏟아냈다. 크크큭- 목에 걸린 것 같은 기이한 웃음소리다. “.........마지막 인형....” 마침내 인형의 머리위로 마지막 머리카락이 붙었을 때, 여자는 허리가 꺾일 만큼 키득거리기 시작한다. 살아있는 것처럼 눈동자에 빛이 나는 인형이 그녀의 피투성이 손에 쥐어져 있었다. 연신 그 손으로 인형을 어루만지던 여자의 눈동자에서 설명할 수 없는 광채가 번뜩였다. “아아.....잠들 수 있게 해줄게..............괜찮아............” 마치 뭔가에 정신이 팔린 것처럼 여자는 웃다가 울듯이 속삭이며 TV 리모콘 을 다른 손에 쥔다. 달칵- 하고 전원이 켜지는 소리가 들리자 화면이 밝아 졌다. = 정확한 시계, ****가 새벽 0시를 알려드립니다.= 라디오에서 청아한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곳에는 인형과 그 녀, 이렇게 둘 밖에 없었다. 1. 율곡은 유신이 들어설 때까지 아무 생각 없이 신문을 들추었다. 며칠 전에 막 마감을 끝낸 것이다. 이제 원고가 교정과 편집에 넘어갔기 때문에 미술 부가 바빠지는 시점이었다. 기자들은 잡지가 나올 때까지는 조금 숨 돌릴 여유가 있다. 하물며 유신이 출근한 시간도 오후 2시였다. 비록 유신의 숙 소가 사무실 윗 층이었지만. “괜찮아요?” 그가 알기로 이유신은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 니었지만, 그렇다고 그 연한 눈꺼풀을 아직도 술기운에 물들이고 나타날 정 도아니었다. 요새 과도하게 많이 마신다는 기분이다. 그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걸까? 오후 느즈막하게 나타난 그는, 자신의 자리로 휘청 휘청 들어가 책상 위에 얼굴을 묻고 부비적거리고 있었다. 뭔지는 몰라도 잠이 덜 깬 사람 투정부 리듯, 보기 딱하다. “율곡..........” 그런 유신이 자신을 희미하게 부른다. 거의 반쯤 빈사상태에 빠진 것 같은 목소리다. 신음같은 음성이다. 그 바람에, 조미경이 힐끗 이 쪽을 쳐다본다 . 그녀는 거울을 보며 눈썹을 다듬는 중이었다. “........율곡...” “..시체처럼 부르지 말아요.” “........나 커피 좀...” 유신이 너무나 힘겨워 보였기에, 율곡은 자리를 털며 일어섰다. 조미경이 힘차게 손을 놀리며, 그런 둘을 한껏 비웃는다. “이유신. 그러니깐 마감 끝나면 작작 좀 마셔. 어제는 남의 학교에 들어가서 새벽까지 마시다가 애들하고 농구했다며? 아침에 M고등학교에서 전화왔어. 자기, 기자증 주웠다고.. 제발 작작 좀 해. 당신이 무슨 강철 체력이야?“ 진한 모카커피 향이 난다. 율곡은 검고 퇴폐적인 커피잔을 흐뭇하게 바라보 았다. 유신의 자리로 조심스레 들고 간다. 정말 미경의 말처럼 피곤에 찌든 모습이다. 저번 달에 멋지게 자른 머리카락을 책상에 마구 흔들며, 유신은 오바하는 동작으로 율곡에게 컵을 받는다. 한 모금 마시고야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캬하~ 바로 이 맛이야.” 쯧쯧- 미경의 혀 차는 소리가 바로 뒤를 잇는다. “자기 요새 무슨 일 있어? 왜 그렇게 몸을 망가뜨려?“ 조미경이 여자나 남자나 할 것 없이 붙이는 이 ‘자기’라는 호칭에 한동안 얼마나 모두들 몸서리쳤던가. 지금이야 비록 익숙해진 탓에 자체 필터링으 로 걸러 듣지만. “나요?” 유신이 일부러 게슴츠레한 눈을 지으며, 조미경의 자리를 향해 철썩 달라붙 는다. “나, 미경이 선배랑 연애할까봐........ 난 나 걱정해주는 사람이 제일 좋더라........“ 조미경이 잔소리를 할까봐 의례 수 쓰는 행위다. 율곡이 부드럽게 미소짓자 , 미경의 잘 그려진 눈썹이 화려하게 한 쪽만 쓰윽 올라간다. 달칵- 그대로 그녀가 일어섰다. 여전히 유신은 미경 쪽 자리 유리창에 달라붙어서 좀비 처럼 헤헤거린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미경은 무서운 여자다. 대체로 그녀는 무표정 했다. 어딘가 어마무시한 그 느낌 그대로, 조미경은 유신의 잘 다듬은 삐죽한 머 리카락 한 줌을 쓰윽 쓰다듬는다. 여느 여자가 했다면 상당히 애로틱한 장 면이지만, 율곡은 알고 있었다. 미경에게 함부로 장난 친 자들은 죄다 보복 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유신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자기, 그거 알아?” “..........우리 결혼할까요, 선배?” “결혼? 좋지~ 자기는 딴 건 하나도 내 취향이 아닌데 얼굴만 내 취향이거든.“ 왠지 목이 간지럽다. 율곡은 웃어야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본다. 미경이 저렇게 나긋한 목소리로 말한다는 것은 일종의 경고다. 이 뒤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말이다. “정말? 그럼 나 데리고 살아줄 수 있어요? 제가 좀 잘생기긴 했죠.“ “그럼, 죽여주게 생겼지. 당연히 나는 한 가지만 생각해. 자기랑 결혼하면, 2세는 분명히 멋질거야. 자기 닮은 아들 딱 둘만 낳고 싶어.“ “이야, 진짜? 진짜? 야, 강율곡! 너 어서 식장 예약해. 미경이 선배 말 들었지? 씨바- 감동이야...........“ “근데 말야, 이유신.........” 역시 이유신은 농담을 할 때 빛이 난다. 이제야 거의 겨우 정신을 차리듯 보였다. 의기양양하게 눈까지 빛내고 율곡을 향해 윙크하는 유신이었다. 바 야흐로 미경의 청천벽력같은 한마디를 듣기 전까지, 그는 꽤 귀여웠다. 적 어도 율곡은 그 순간 궁지에 몰린 유신이 너무 웃겨 죽을 것 같았다. 미경 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근데 말야..이유신.. 넌 딱 아들 둘만 낳아주면 돼. ........난 아들 둘만 있으면 되거든.. 그러면 말야, 잘 키워서...“ “잘 키워서?” “.........근친교배 시킬 거야. 최고의 종자를 가려내는 거지, 음하하하하하! 유전학이 틀렸음을 보여줄 거야! 아우~ 난 천재야, 씨바! 하하하하!!!!” 쿵- 하고 유신이 유리벽에 머리를 박았다. 미경이 마녀처럼 웃으며 가방을 들고 걸어간다. 그러기에, 이유신- 당신의 해맑은 농담은 아무에게나 먹히 는 게 아니라니깐! 2. “선배에게 불면증이 생겼단 말인가요?” 율곡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러니 여기 앉아서 이유신이 해장밥을 먹는 동안 담배나 피고 있는 거다. 때마침 GAS 휴게실에 계약 기자들이 인사하고 들어선다. 그들은 유신의 피폐하면서도 어딘가 아름다운 듯한 얼굴을 눈여 겨보며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유신이 볼 가득히 밥을 미어지게 넣고는 뭔가 못마땅한 듯 툴툴거리는 게 웃겼던 것이다. 하긴, 나라도 못 믿겠다. 이유신이 불면증이라니-! “왜들 웃고 그래? 불면증이 얼마나 심각한지 몰라서 그래? 잠 못자면 죽는다구. 난 죽기 싫단 말야. 이 젊은 나이에 총각귀신이라니-!! 얼마나 많은 처녀귀신들이 달라붙겠어..아우.. 살아서도 여자 걱정, 죽어서도 여자걱정..“ 퉁퉁 부은 귀여운 눈꺼풀- 그러나 사람들은 유신의 파란만장한 넉살을 즐긴 다. 아마 GAS에 유신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즐거운 일은 없었을 것이다. 모두가 그의 말을 심각하게 듣지 않는다. 그리고 어쩌면 그 역시도 심각한 말은 거의 던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유신의 그런 성격을 좋아했고, 또 율곡 도 언제나 그랬다. 그럼에도 가장 열심히 일하는 유신의 성실성을 다들 높 이 평가한다. GAS 내에서 딱 한 사람- 한 기혁 기자만 빼고 대부분은 유신 을 좋게 생각했다. “인쇄 넘어갔대? 디자인 팀장 자리에 없네?“ 그 때 문제의 한기혁이 휴게실로 걸어왔다. 오전 내내 사무실을 비운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퍽이나 안정적으로 보인다. 잘생긴 미간을 살짝 흐리다가 율곡을 향해 빙긋이 미소지었다. 자신이 알기로 그는 어제 유신 이 소개시켜준 시아라는 가수와 저녁을 먹었다고 한다. 그런 거 보면 강심 장이다. 아무리 보아도 기혁은 유신의 레이다에 걸려 있는 것 같은데, 한기 혁 쪽이 훨씬 더 옹벽수비에 강하다. “근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게 웃어?” 커피를 타면서 기혁이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그가 율곡의 옆자리, 유신의 맞은 편에 앉으며 말이다. 휘휘~ 절로 가라- 저 쪽에도 자리 많다구!- 율곡 은 들리지 않게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 때 사진기자인 임왕준이 즐거운 표 정으로 조롱하듯 말했다. “이유신 기자 불면증에 걸렸대요. 믿기지 않아서요. 저 사람이 불면증에 걸리면, 우리도 나이트 메어에 시달릴 거에요.” 보통 같으면 아마 유신이 대답했을 것이다. 그것도 한창 장난을 치듯 중얼 거리거나 소위 투덜대는 말투로. 그러나 율곡은 알고 있었다. 그 천하의 이 유신도 기혁만 등장하면 대뜸 진지해지는 것이다. 물론, 그 진지함이 천분 의 일 정도여서 문제이지만- 그나마 그 정도의 진지함도 이유신에게서 볼 수 있는 아주 희귀한 현상 중에 하나다. 그러니 자신도 짐작하게 된 것이다 . 이 쪽은 이 쪽에게 심각하게 반해있다- 라고. 아무도 안 물어보지만, 스스로 단정짓기를.. 아마, GAS에서 기자를 뽑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정체성이다. 바로 성적 정 체성. 모두가 모른다 하더라도 율곡은 알고 있었다. 미경이 선배도 여자를 좋아하고, 율곡 자신도 남자를 좋아한다. 유신도 능히 그럴 것이고, 아마 한기혁만 다른 식으로 입사한 것이다. 이래서 낙하산 인사란 안 좋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동감하고 참여하는 기준에 알맞지 않은 사람이 종종 뽑히는 게 낙하산 인사다. 하하하. “불면증?” 눈썹을 찡그리며 기혁이 커피맛을 음미한다. 뭔가 조금 생각하는 눈치였는 데, 유신 쪽은 밥만 우거적 거리며 열심히 먹을 뿐이다. 율곡은 슬슬 유신 이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선배, 그만 둬요. 낙하산으로 들어온 한기혁 선배 는 노말이랍니다. “이상하네... 어제 시아도 그런 이야기를 하던데....“ 뚝- 분명히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유신의 숟가락이 조금 떨렸다. 눈치없 는 다른 기자가 저 너머에서 큰 소리로 브라보- 라고 외쳤다. “와, 한기자 님, 그 여자랑 데이트 했어요? 걔 멋지던데!! 왕 섹시~“ “데이트 까지는 아니고... 최근에 불안 증상이 생겨서 잠을 못잔다길래,... 여러 가지 운동 좀 즐기라고 해 줬지.“ 유신이 물을 벌컥 벌컥 마신다. 율곡은 이를 어쩌나- 하는 눈빛으로 웃음을 겨우 참으며 팔짱을 꼈다. 눈치없는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기혁의 그 발언 이 즐겁다는 듯 화제를 옮겨간 것이다. “아..운동.. 육체 운동도 들어가는 건가, 그럼? 오오.. 드디어 우리 가쉽과 스캔들의 목표에 맞는 대형 스캔들이 터지겠구만.. 기자 한기혁과 가수 시아-! 그 이루지 못할 사랑!“ “그렇지! .....이야.. 기혁이 선배 여러 치정 사건에 연루된 적 있다더니, 역시 소문대로군요. 나도 다음에 만나면 시아씨 싸인이나 받아줘요.“ 불쌍한 이유신. 정말 귀엽다, 저 선배.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짐짓 태연함을 가장하려 애쓴다. 율곡은 정말 한 마디 충고해주고 싶었다. 이봐요, 선배- 같이 바람피워 버려요. 라고. 저 사람, 생긴 건 초날라리처럼 생겼으면 의외로 순정적이다. 바람둥이라는 정평이 나 있지만, 사실 아니라는 것이 율곡의 생각이다. 아니, 이유신은 바람을 피기에는 너무 거짓말을 잘 한다. 그것도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말을 . “시아씨가 불면증에 걸렸대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왁자지껄 떠나가자, 그 때서야 목에 막힌 게 넘어 간 듯 유신이 고개를 든다. 기혁은 커피를 홀짝이며 가볍게 끄덕였다. “그렇대. 사실, 아까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 이런 이야기 못했지만...” 달칵- 유신이 다 먹은 일회용 그릇들을 치우는 사이, 기혁은 그 때서야 천 천히 입을 열었다. 율곡은 그의 그런 태도에 눈썹을 씩 밀어 올린다. 한기 혁은 참 무미건조한 사람이다. 아니면 스스로의 열정을 감추고 살아가는 사 람이거나. “요새 협박을 받는 모양이야. 협박이나 스토커나..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런 것 같더군.“ “..................??”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 그조차 매우 건조해 보인다. 마치 삶이 무료해-라고 말하듯, 그는 정말 표정없는 목소리였다. 율곡은 과연 그가 유신의 색깔많 은 표정이나 시선 그런 것들을 잡아 낼 수 있을지 궁금했다. 가령 예를 들 자면, 유신의 바로 저런 표정. 살짝 휘어지는 눈꼬리라던지, 혹은 입가에 깊게 패는 웃음의 자국, 이런 것들. “악랄한 스토커라면 경찰에 신고하면 되지 않나?” 아무래도 긴장한 유신이 안쓰러운 까닭에, 율곡은 드디어 말문을 연다. 이 때까지는 별로 시아라든지, 그런 스토커 성 협박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기혁이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휴게실 테이블 위로 불쑥 상체를 내 민 것이다. 그가 뭔가에 집중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내가 어제 듣기에는 거의 스토커를 넘어선 범죄였어. 누군가 피 묻은 인형을 보냈다는 거야. 시아가 불면증에 걸릴만큼...........” “............?” 이상하게 조용하던 유신도 갑자기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쓸데없이 읽지 도 않는 잡지를 들추며 유신이었다. 왠지 자신도 몸이 긴장되는 기분이다. 율곡은 조심스레 기혁에게 고개 돌린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언제나처럼 표정없는 얼굴이었뿐. “글쎄, 피가 묻은 채 신체의 한 부분이 잘려 나간 인형.. 뭐 그런 걸 받았대. 아는 연예인들도 두달 남짓 그런 선물을 받았다는군. 미친광이 스토커겠지, 뭐...“ “경찰에 신고하는 게 낫겠네요.” 조금 싸늘하게 유신이 대답한다. 하긴- 이라고, 율곡은 그의 속을 넘겨짚으 며 웃었다. 자기라도 그럴 것 같다. 이 쪽은 저 쪽을 충분히 마음에 들어 하는데, 그 사람이 자기에게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 달라고 말한다니. 자신 이라도 정말 심란할 것 같다. 물론 기혁은 그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오직 시아에게 일어난 일만 신경 쓸 뿐.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겠지. 꽤 많은 여자 연예인들이 문제의 소포를 받았다고 말했어.“ “......................!” “아무래도 직업적인 노출이 많은 연예인들이니깐, 대충 넘기려는 것 같아. 섬뜩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큰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반짝- 유신의 눈동자가 갑자기 반짝였다. 적어도 GAS의 기자들이라면 그렇 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대박’이었다. 3. 최근에 데뷔해서 인기를 얻고 있는 시아는 S 엔터테이먼트 소속이었다. 스 물 셋의 나이, 그리고 적당히 손 댄 얼굴. 맑은 목소리와 고만고만한 가창 력, 또한 괜찮은 랩 실력. 이 정도면 인기를 얻을만하다. 그러니 그 인기를 부디 대중들이나 같은 연예인들에게만 얻었으면 좋겠다. 한기혁이 아니라- “어머, 어제는 한기자님이 오셨는데, 오늘은 이기자님이 오셨네요?” 라고 웃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화가 나려 한다. 그럼에도 유신은 밝게 웃으 며 매니저와 악수를 했다. “우리가 원래 시아씨 일이라면 달려오잖아? 피 끓는 청춘남녀들의 만남이라- 요새 기혁이 선배랑 잘 돼 간다며? 시아씨 잘 알잖아? 우리는 짤릴까봐 기사꺼리 없으면 이 한 몸 받쳐 스캔들을 만들지.” 말도 안 되는 농담까지 던진다. 그러나 이유신은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빤히 안다. 언제나 여유만만하게 웃음을 던지는 역할. 그 쯤이 좋다고 생각 하는 것이다. 특히 짝사랑하는 사람과 제대로 되지 않을 때는 자존심 있게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한다. 사랑하는 방식은 자신없지만, 이별하는 방식은 자신있다.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다. “그리고 시아씨.” “.............?” 시아와 매니저는 밴에 올라탔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같은 차에 올라타며, 유신은 매니저에게 들리지 않게 소곤거린다. 깨끗하고 동그란 눈동자. 그녀 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질투를 느껴야한다는 게 너무나 우습다. 아니 , 유신은 실제로도 살짝 날카롭게 웃었다. “시아씨.. 우리 회사의 연예 담당은 나야. 아무리 기혁 선배가 좋아도...“ “.....네.......?” “난 펜 끝 하나로 널 망칠 수도 있고, 띄워 줄 수도 있어. 알지? 꼬마 아가씨가 믿는 것보다 훨씬, 난 비열해질 수 있다구.. 이 세계에서는 아무도 믿지마. 나도 믿지 말고, 기혁이 선배도 믿지마. 무슨 말인지 잘 알지? 내게 좋은 기사꺼리를 남에게 제공하지도 말라구..“ 명백한 경고. 그러나 상대방은 그 씁쓸한 미소의 뒷 끝을 알아차리지 못하 는 경고. 유신은 가볍게 고개 끄덕이며 미안한 표정 짓는 시아가 정말 얄미 웠다. 조금 스스로를 자책했다. “누가 보내는 건지 알 수 있잖아? 적어도 등기라면.. 그리고 너 뿐만 아니라 많은 애들이 받고 있다면...“ 밴이 출발하자 매니저도 조금 심각한 표정이 되었고, 시아도 살짝 인상을 찡그린다. 곤혹스러운 기색이다. 유신은 어깨를 으쓱하며 녹음기와 수첩을 같이 챙긴다. 연예인과 기자- 둘 사이의 미묘한 경계 의식이 서로를 더 긴 장하게 만들었다. “그렇긴 하지만.. 그 소포는 주로 아무런 표시도 없이 수위실에 도착해 있어요. 누군가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인데..“ “.......직접? 그럼 인상착의라도 알 수 있을텐데.. 불면증에 걸릴 정도였다며?“ 아아- 라고 긴 생머리를 흔들며 소녀 아닌 아가씨가 난감한 듯 웃었다. “그게요, 기자님..” “..........?” “팬들 틈에 섞여 있어요. 아저씨가 한사코 안 받겠다고 해도, 가끔 팬들이 제가 오는 시간에 맞춰서 수위실 앞에 두고 가죠. 저 말고 다른 언니들도 그런 걸 당한 것 같아요. 지금 유명하다는 언니들은 적어도 한번씩...“ “...지금 유명하다는 가수들 죄다?” “가수들 뿐만 아니라 연기자 언니들도요. 가연이 언니 같은 경우에는 대기실에 놓여 있는 그 인형을 받았구요, 유진이 같은 경우에는 밴에 직접 놓여 있었대요. 다른 사람들도 한 서너명은 더 받았다고 알고 있어요.“ 달칵- 유신은 갑자기 녹음기를 끄며 혼란에 빠졌다. 순진한 눈빛의 이 아가씨는 되바라지고 건방질지언정, 그다지 머리가 좋지 않다. 누군가의 스포트를 받 기 위해 이런 자작극을 할 사람도 아니다. 최근 기혁과의 관계로 인해 마음 에 썩 들지 않지만, 문득 그녀가 불쌍했다. 불면증이라- 그 고통에 시달리 는 자신이라면 더욱 그렇다. 기혁을 젖혀두고 생각한다면 충분히 친절하고 싶은 여자다. 유신은 잠시 이마에 손을 올린 후에, 보다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 인형, 나에게 보여줄 수 있어?” “.........기자님께요? ...보셔서 뭐하시게요?” 이번에는 이 쪽에서 조금 곤란하다. 그녀에게 말해 줄 수 없는 몇 가지 비 밀. 그것 때문에 둘러대야 하는 것도 난처하다. 그럼에도 씨익- 유신은 친 절하게 미소 지으려 애썼다. 내가 해결해 줄게, 꼬마 아가씨. 그러니깐.... “기자 때려치우고 인형 장사할라구, 아가씨.” “...에, 진짜요?” “그럼! 난 원래 영업체질이라니깐~“ 그러니깐, 내 것은 건드리지마. 4. 그 쯤에 기혁은 놀라운 전화를 받았다. 그 유명한 언론회사인 P 사에서 자신을 부른 것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취 재차 나갔다가 마주친 보도부장이 먼저 불렀다. 그런 주류 언론에서 자신을 아는 척 하는 것도 이상하고, 무엇보다 직접 P사 대주주이자 이사장인 국 장을 만나는 것도 이상하다. 그럼에도 기혁은 푸른 녹차를 한입 마시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이만큼 이 바닥에서 유명한 인물이 부른다면 필시 뭔가 용건이 있어서이다. 자신과 같 은 정식도 아닌 기자, 그리고 한낱의 가쉽과 스캔들 기자 따위를 부른다면 더욱 용무가 분명한 것이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원래 언론인 출신이지.” “..............?” 설마, 자기가 정식 기자 출신이었다고 자랑할 속셈인가? 가쉽과 스캔들 기 자를 불러서 할 말이 겨우 그거란 말인가? 시간 아깝다. 기혁은 늘 짓는 무 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리 의리한 가구들과 괜찮은 데스크- 일단 부의 차이를 실감하게 한다. “그렇지만 그걸 말하려고 부른 건 아니고.... 한 기혁 기자라고 했나?“ “...네.” 별로 흥미로워하지 않는 눈치를 보이자, 국장은 정색을 하고 손에 깍지를 낀다. 그나저나 시아를 취재하러 나간 유신은 잘 다녀왔는지 모르겠다. 아 까 밥 먹을 때 상당히 컨디션이 안 좋아보이던데, 안 그러던 녀석이 풀 죽 어 보이니 왠지 신경 쓰인다. 어서 P 언론사 국장이 본론을 끝냈으면 좋겠 다. 여러모로 시아의 일 쪽이 훨씬 궁금하다. “한기혁 기자.” “말씀하시죠.” “자네 우리 회사에서 일해 볼 생각 없나?” “............??!!!” 설마 뭔가를 잘못 들은 건가 싶었을 때, 갑자기 두어번 확인하는 묵직한 목 소리가 귀를 뚫었다. “한 기자, 우리 회사에서 정식 기자로 일해 보면 어떤가. 캐리어도 쌓고, 이제는 기자 출입증을 내밀어도 모두가 알아줄 걸세.“ “기자 출입증에는 관심 없습니다.” “그래.. 하지만, 그 출입증을 얻기 위해 많은 걸 거는 사람도 있지.“ 기혁은 갑자기 자세가 불편해졌다. 꺼림칙한 목소리, 뭔가 흉계를 가득 가 진 듯 속셈이 보이는 늙은 너구리. 그런 것들이 상대방에게서 연상된 것이 다. “국장님.” “....말하게.” 기혁은 조금 미소지으며 친절하게 뒷목을 두드렸다. 어제 겁에 질린 시아를 너무 새벽까지 위로해 준 게 문제다. 온 몸이 뻐근하다.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은 꼭 한다고- 기혁은 살짝 웃었다. “저는 인생에서 반드시 오고 가는 게 있다고 배웠습니다. 일종의 도박이죠. 기자 출입증, P사의 정식 기자- 이런 것들을 걸고 싶으시다면, 교환할 뭔가가 필요하신 거 아닙니까?“ “.................” 오랜만에 늙은 너구리의 눈동자에 회심의 빛이 비춘다. 단도직입적이고 시 원한 기혁의 말에 국장은 쇼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가식적인 눈동자와 위 선적인 미소가 읽혀졌다. 원래 그런 느낌들에 별로 좌우되지 않는 자신인데 도 기분이 몹시 뒤틀린다. “물론이지. 원하는 게 있으니 거래를 제안하지. 역시 GAS에서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청년이군.“ “본론을 말씀해주시죠. 저는 바쁘거든요.“ 시계를 보며 상대방을 놀리듯 덧붙이자, 국장은 기가 막힌 듯 털털거리며 웃었다. 그리고는 쓰윽- 오래되고 영악한 사업가가 흔히 그러듯, 보다 진중 한 자세로 갑자기 몸을 내민다. 범죄처럼 번뜩이는 그의 눈동자에 기혁은 저절로 얼굴을 굳힌다. 그가 말했다. “원하는 게 물론 있네.” “.............” “이유신을 내게 돌려주게. 내 아들, 이유신 말이네.“ “...........-!!!!!!!!” “그 녀석은 나를 증오할지 몰라도, 나는 그 녀석 애비야. 내 아들이 그런 하찮은 곳에서 기자라는 명목으로.. 아니, 광대짓이나 하고 있다는 게 마음에 안 들어. 집안의 흉이 되지.“ 기혁은 표정없이 그를 응시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냉정하게 사업가처럼 잘라 말했다. “이 유신이 GAS의 기자를 포기하게 만들어준다면,.. 자네가 원하는 걸 적어도 몇 가지 이상 들어줄 수 있네. 우리는 그 동안 조사를 충분히 했지. 모두가 말하길.. 자네가 말귀를 알아듣는 그곳의 유일한 기자라고 하더군.“ “..................” 유신의 아버지가 말했다. 그 순간, 기혁은 문득 예수를 팔아버린 가롯 유다 가 떠올랐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 녀석은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에 들어오길 싫어했지.” 그리고 기혁은 자신의 뇌리를 사로잡는 뭔가 중요한 발언을 들었다. “그 녀석에게 문제가 많다는 걸 자네도 알 거야. 같은 사내 녀석을 좋아하는데다가, 심지어 얼마 전까지는 유부남도 사귄 녀 석이지. 뻔히 가정이 있는 녀석과 5년을 사귄다고 내 집에서 나간 녀석이네 .“ “............-!!!!!!!!!!” 조금 먼 곳에서 들려오는 음성처럼 사뭇 그렇게 들렸다. 기혁은 약간의 이 상한 느낌, 마치 공간이 휘는 듯한 그런 기분에 가만히 그를 노려본다. 이 희미한 갑갑함의 기분을 어린 시절에 딱 한번 느꼈었다. 시공(時空)의 압력 이 자신을 억누르는 그런 기분- 바로 중력(重力), 지구 중심을 향해 당겨지 는 힘. 5. 그 인형을 보는 순간, 유신은 부두교(voodoo)가 떠올랐다. 현존하는 가장 강력하고 악랄한 저주, 부두교의 인형. 그것이 잘못된 정보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저주와 인형- 그 두 가지 사이의 토테미즘적인 환상은 아직도 인간이 가진 잔인함과 야만성을 자극한 다. 본래 인형이란, 인간의 성격을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한 부족, 한 씨족, 그리고 각각의 사람들을 나타내기 위해 혹은 신으로 모시기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상징. 유신은 시아에게서 받아온 인형과 나머지 수거한 인형들을 이리저리 움직이 며 회의실 자리에 앉아 있었다. 창 밖으로는 초겨울이 내려앉았고, 그 차가 운 기운과 괴기한 섬뜩함이 몸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벌써 밤늦은 시간이었 다. 인형을 받은 사람은 총 5명. 그리고 각각에게 배달된 5개의 인형은 어딘가 한 가지 외관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팔이 없는 인형, 다리가 없는 인형, 그리고 가슴의 반쪽이 날아간 인형, 눈이 빠진 인형, 마지막으로 시아가 받은 머리가 없는 인형.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인형들은 피투성이었다. 정말 인간의 피일까, 혹은 동물의 피일까- 라는 궁금증이 들 정도로, 혈액이 오 래되어 빛바랜 특유의 색깔로 얼룩져 있다. 때문에 이것은 더욱 참혹해 보 였다. 인형들의 외관은 달랐다. 옷차림에 있어서도 한가지 공통점 밖에는 없었다. 가슴에 모두 ‘다비드의 별’이라고 부르는 별이 달려 있다는 것이 다. 삼각형을 두 개 엇갈려 놓은 듯한 별모양은 손톱만한 크기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못했지만, 아무튼 이상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인형들은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사람과 닮아 있다. 키가 70cm 정도 되는 큰 인형들이었고, 하나 하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까닭에 꼭 작은 사람 들의 시신을 나열하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해진다. 이상한 저주인가- 라고 생각하며 유신은 턱을 문지른 채, 혼자 회의실의 탁 자를 내려다본다. 이미 2층에 올라간 줄 알았던 율곡이 들어오기 전까지, 그는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른들이 말하기를, 꿈에 인형을 보면 자기가 죽을 꿈이라고 해요.” “.................?” 율곡은 종교나 주술, 점성학, 사주, 그리고 심리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가 세계의 신화나 전설들을 수집한다는 건 GAS 사람들이면 다 아는 사실 이다. 이미 밤 10시를 넘겨서 뭔가 기분이 착잡했었는데, 반갑게도 율곡이 들어서서 한결 느긋해진다. 녀석은 호주머니에 손을 꽂고 느릿 느릿 들어오 다가 유신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 짓는다. 그리고는 여전히 침착한 자 세로 허리를 굽혀, 인형들을 살펴본다. “이게 시아씨에게 받아온 인형인가요? 기분을 묘하게 만드는 인형들이네요.“ “기분이 묘한 정도가 아니지. 뭔가 끔찍한 일을 예고하거나.... 혹은 경고하기 위한 표시같아. 인형들은 흔히 상징의 의미잖아?“ 아- 라고 율곡이 짧게 신음하며, 인형 하나를 들어올린다. 시아가 받은 문 제의 인형이었다. 목이 잘려 나간 자리에 핏덩이들이 말라붙어서 끔찍한 뭔 가를 연상하게 만든다. 누군지 몰라도 이런 걸 보내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인형에 대한 영화가 생각나요..” “그래, 너 문화부 담당이야. 제발, 이런 데서는 무서운 이야기 하지 말라구.. 실제로 보는 것보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의식하게 되잖아?“ 너스레를 떨며 율곡의 어깨를 툭-치자, 그가 씽긋 웃었다. 그대로 잘려나간 인형의 목을 찬찬히 바라보며 녀석은 중얼거린다. “제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전시장에 관한 영화였어요. 밀랍 인형들로 가득 찬 전시장이었는데, 전시된 밀랍인형들이 너무 사실적 이어서 매우 인기가 많았죠.. 정말 사람같은 인형들이 빽빽이 차 있던 영화 장면이 떠올라요..“ “.........나도 그 영화 케이블TV 로 본 적 있어. 오래된 영화지. 가장 끔찍했던 장면은, 그 인형들이 실제 사람들이었다는 거야. 인형을 만드는 장면이 나왔는데..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생각나. 어두운 작업실, 두개의 양동이.. 하나에는 피로 가득 차 있고, 다른 하나에는 인간의 내장이 가득 차 있었던 ...“ “네. 실제의 사람에게서 혈액과 장기를 비워내고, 방부제와 솜으로 가득채운 박제처럼 밀랍인형을 만든 거죠. 선배도 그 영화를 보셨군요..“ 율곡은 작게 웃으며, ‘커피?’라고 물었다. 유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나간사이에 화이트보드에 빠르게 몇 자를 갈겨 적는다. 우선은 인형을 받은 순서대로 이름을 나열했다. 1. 인기탤런트 유가연 - 발목이 잘린 인형. 2. 가수 강유진 - 손목이 잘린 인형. 3. 인기 VJ 손태영 - 가슴이 반쯤 잘린 인형. 4. 뮤지컬 배우로 최근 전업한 전직 가수 이원희 - 눈이 빠진 인형. 5. 신인 인기 가수 장시아- 목이 잘린 인형. 어차피 불면증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유신은 별 생각없이 보드에 적고 있 었다. 율곡이 커피 컵 두 개를 들고 들어오는 사이에도 벌써 몇 분이 흐른 다. 그들은 기혁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 칠판만을 쳐다보며 각각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마감도 끝났는데 다들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냐?” 휙- 고개를 돌리자마자, 회의실 문가에 기대어 있는 기혁이 보였다. 유신은 작게 한숨쉬며 변명처럼 밝게 둘러댄다. “불면증이면 밤이 긴데다가, 선배가 관심 있는 시아양에 관련된 일이니깐 요.” 율곡이 옆에서 또 의미모를 웃음을 지었다. 기혁 역시 어깨를 으쓱하며 피 곤해 보이는 몸짓으로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저 사람이야 말로 마감도 끝났 는데, 하루 종일 어디 다녀온 건지 궁금해진다. 원인없는 궁금증- 그것이야 말로 위험한 감정이다. “이 탁자위에 놓여 있는 좀비들은 뭐야?” 인형을 건성으로 툭툭치며 기혁은 중얼거린다. 율곡이 체크무늬 셔츠의 팔 을 걷으며 인형들을 상자에 담았다. “유신이 선배가 받아온 문제의 인형들이라고 하네요.” “누군지 몰라도 취미가 나쁜 사람이군.. 왜 저렇게 난도질을 해 놨지?“ 그는 그냥 가볍게 말하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사뭇 피곤한 기색이다. 아무 래도 새파랗게 뜨는 여자 가수와의 데이트가 그의 원기를 빨아먹는 모양이 다. 유신은 씁쓸한 생각으로 보드만 쳐다본다. 기혁이 그런 자신을 향해 뭔 가 못마땅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귀신이 안 보여?” 쿡- 하고 율곡의 웃음이 목에 걸린다. 유신은 낭패감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율곡은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다. 오랜 시간 같이 비슷한 분야에서 취재하 면서 서로의 비밀을 적어도 한 가지 이상 알게 되었다. 자신과 같은 경우, 어려서부터 겪어온 이상한 영능력이 그 중 하나였다. 기혁은 기실 이전에 다른 사건, K 고등학교 자살사건을 계기로 그 비밀을 직접 알았다. 유신은 기혁의 목소리에 숨어 있는 날카로운 기색을 읽었지만, 조금 가라앉은 목소 리로 대답했다. “안 보여요. 기분은 물론 안 좋지만..........” “그럼 다행이네. 적어도 아직 누군가 죽은 것은 아니군...“ 유신은 순간 목덜미를 스치는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어쩌면 기혁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사람이 아닌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다행이다. 자신의 생각처럼, 이 일은 그저 연예인이라는 특수성에 대한 일 종의 ‘경고’ 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아직 이런 사이코 짓으로 희생당한 사람은 없단 말이다. “도대체 이 녀석들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는지 모르겠어. 공통점이 있어야 하나로 묶어서 뭔가를 파헤치지...“ 유신은 급기야 어깨를 으쓱하며 율곡을 쳐다본다. 기혁과 눈을 마주치지 않 으려 필사적이었다. 물론 기혁이 표정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기 전까지는 말 이다. “너는 왜 앞으로 일어날 일이라고만 초점을 맞추지? 반대일수도 있어, 이유신. 어떤 일어난 일에 대한 경고.. 그러니깐 굳이 미래의 일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과거의 일을 되짚어 주 려는 거 아닐까? 그 다섯 명의 여자들이 저질렀던 어떤 일에 대한 복수의 경고 일수도 있다 구.. 흔히들 추리소설에선 그런 일이 많잖아?“ 어딘가 평상시보다 건조한 음성. 몸이 불쑥 차가워졌다. 유신은 보통 때보 다 조금 더 삐딱해진 그의 태도에 기분이 사나워진다. 어지간하면 오늘은 푹 자고 싶었는데, 이 밤에 왜 잠들지 않고 나타나서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조금 불만스럽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유신은 따지듯 되받아친다. “.........하지만, 그렇다면 굳이 왜 미리 경고까지 하면서 그런 일을.... .....” - 이라고 끝까지 다 말하지 못했다. 그 순간에 분명히 보인 것이다. 테이블 위로 앉아 있는 기혁의 무릎 위에, 또 다른 무언가가 앉아 있었다. 작고 어린 아이. 핏기 없는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는 여자아이. 얼굴에서 모든 핏 줄기가 빠져 나간 듯 창백해 보였고, 반면에 아기가 입고 있는 하얀 옷은 온통 핏물로 얼룩져 있었다. 그리고 아이가 가리키는 손 끝- 그것이 자신의 말문을 막았다. 바로 유신 자신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선배...” 유신은 천천히 기혁의 무릎에서 고개를 들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알게 되었다. 기혁의 말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이미 누군가가 이 인형들 에 관련된 일로 죽었고, 또 이 일은 저 아기의 죽음에 관련된 어떤 메시지 인 것이다. “왜 갑자기 노려보는 거야?” 영문을 모르는 기혁이 더욱 못마땅한 듯 신랄하게 웃었다. 유신은 맥이 빠 진 기분으로 율곡과 그를 돌아보며 작게 한숨을 쉰다. 자신은 정말이지 진 지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 회의실에 없어도 좋을 존재들, 인형과 아 기 귀신은 기어코 스스로를 진지하게 몰아가고 있다. “기혁이 선배...” 기혁이 일어나자 여자 아이는 표정없이 따라 일어나며 기혁의 몸 위로 기어 간다. 어깨 위에 매달린 채, 이 쪽을 노려보는 그 눈길에 소름이 끼친다. 지금까지 많은 영적 에너지를 만났지만, 이 경우만큼 오싹한 것은 많이 없 었다. 그것이 아기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온 몸이 산산조각 난 듯한 피투성 이 아기. “불렀으면 말을 해, 이유신.” 인상을 찡그리는 기혁을 향해, 유신을 조금 허망하게 미소지었다. “선배 혹시 우리 모르게 숨겨 놓은 아이 있어요?” “...........????” 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다시 주먹이라도 날아올 것 같은 표정 때문에, 유 신은 곤혹스러운 듯 웃음 지었다. 율곡만이 진지하게 그런 둘을 쳐다보았다 . 6. 최근에 잘 나가는 여자가수 시아는 새벽 4시 쯤에야 겨우 침대에 들었다. 각종 ENG 와 프로그램, 토크쇼가지 겹치다 보니 하루에 잠드는 시간이 기껏 해야 4시간 정도다. 그나마도 최근엔 불면증 때문에 겨우 눈을 감은 것이다 . 인형 사건으로 가뜩이나 신경이 날카로웠기에, 시아는 불을 켜 놓은 채 잠들었다. 그리고 똑- 똑- 불분명한 소리가 귓전을 계속 때릴 때까지 그녀는 반쯤 잠들어 있었다. 이 상하게도 뭔가가 자신을 깊게 잠들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막상 그 희미한 소리를 들었을 때도 시아는 안간힘을 다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똑- 똑- 누군가 방의 불을 꺼 버린 게 확실하다. 주위가 캄캄했다. 설명할 수 없는 자욱한 안개- 그리고 숨통을 죄이듯 날이 선 공포. 그런 것들만이 암흑 속 에서 자신을 짓누른다. 문득 소름이 돋는 기분 때문에, 시아는 눈을 감은 상태로 천천히 울음을 터뜨렸다. 늘 거실에서 잠드는 매니저조차 부를 수 없었다. 자신이 정말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아니면 실제를 경험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쎄에- 라고 누군가 속삭이듯, 거친 숨소리가 들려온다. 시아는 그것이 바람 소리라는 것을 아주 천천히 깨달았다. 매니저가 자신의 방 창문을 열어 놓 은 것 같았다. 자신의 숙소는 아파트 3층이니, 누군가 함부로 들어올 염려 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 누군가 있다. 자신만이 아니라 누군가가 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있다. 잠든 나를 노려보는 제 3의 눈동 자를- “엄마..............” 뭔가 갈비뼈를 헤어오는 숨 막히는 두려움 때문에 시아는 눈을 뜨지 않았다 . 그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침대보를 움켜쥔 채 어서 자신이 말짱한 이성 을 되찾기를 기다린다. 휘잉-하는 바람 소리가 더욱 거칠게 울렸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식은땀에 온통 젖은 채로,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일단 익숙해진 어둠으로 눈동 자를 굴려 주변을 둘러본다. 다행히 까만 어둠 속 방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 그 꺼림칙한 인형도 GAS의 유신이 들고 갔다. 그러니 이 곳은 늘 안전한 그녀의 요새- 그 마지막 견고한 성이 확실하다. “.......비 때문이잖아....”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시아는 잠옷 차림으로 창문에 다가선다 . 분명 심장이 툭-하고 멈출 듯한 공포를 느꼈는데, 자신도 기억치 못하는 악몽을 꾸었나보다. 그녀는 작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똑- 똑- 하는 작은 소리는 열려진 창문으로 부딪치는 빗물 소리였다. 새벽 5:00 . 무심코 라디오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어둠 속에서도 밝은 디지털 숫자가 시각을 가리킨다. “..........놀랬잖아....” 그녀는 있는 힘껏 입을 열어 혼자 중얼거린다. 그렇게 아직도 가시지 않는 두려움, 온 몸의 솜털이 바싹 서는 듯한 이상한 기분과 발끝까지 저릿한 죽 음의 기운을 털어낸다. 아무도 없었지만, 꼭 누군가 듣고 있는 듯한 기분에 더욱 목이 꽉 막혔다. 조심스럽게 맨발로 창가에 다가서서 창문을 잡았다. 손 끝이 아직도 벌벌 떨린다. 인기 연예인인 탓에 인적이 드문 숙소를 구하다보니, 밖은 아직도 새카맣고 네온사인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그곳에 존재하는 곳은 오직 초겨 울의 차가운 바람- 조금씩 새어 들어오는 그 바람 밖에는 없었다. 삐걱-창문이 흔들린다. 시아는 아직도 심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살짝 어루 만지며 그 문에 손을 올렸다. 이걸 빨리 닫고 불을 킨 다음에 매니저를 깨 울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불면증도 아니었는데, 잠을 깬 후의 무서움이 아 직도 가라앉지 않는다. 그리고 그때였다. “...............-!!!!!!!!!!!!!” 짙은 어둠- 흥건한 물기와 어딘가 비릿한 피 냄새....그리고 휙- 하고 뭔가 무거운 것이 위에서 떨어졌다. 같은 속도로 가슴이 내려앉음과 동시에, 낯 선 누군가와 눈이 딱 마주친다. “...............!!!!!!!!” 자신의 얼굴과 불과 20cm 앞에서 직선으로 마주친 눈동자. 순식간에 빠른 속도로, 창가에 선 그녀 자신을 노리듯 떨어져 내렸다. “.............하.............-!!!!!!!!!!!” 비명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쌕쌕이듯, 갈비뼈 사이로 토해낸 한마디 숨결 이 전부였다. 시아는 천천히 눈을 감고 무의식 속으로 잠겨들었다. 비에 흠 뻑 젖은 작은 물체가 창가에 선 자신을 향해 똑바로 대롱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뭔가가 쓰러지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 그것은 그녀 의 몸보다 반은 작은 인형.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처럼 선명하게 생긴 인형 이 피에 젖은 채, 거꾸로 매달려 떨어졌다. 그 인형은 기절하는 그녀를 지 켜본 유일한 목격자였다. 현장에는 인형과 그녀, 이렇게 둘 밖에 없었다. 7. 온전히 살아있는 마지막 인형이었다. 다른 인형들과 마찬가지로 피투성이었 지만, 그래도 붙어 있을 건 다 붙어 있는 마지막 인형이다. 다섯명의 인기 연예인들을 앞에 두고도 유신은 모처럼 웃지 않았다. 그는 그녀들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애써 농담을 건네지도 않았다. 그 역시도, 며칠 전부터 꾸준히 계속되어온 불면증 때문에 기분이 가라앉은 것이다. 한마디로 컨디션 난조다. “그러니깐,.. 이 인형이 시아양의 방에, 그것도 새벽에 하늘에서 툭 떨어져서 대롱거렸단 말이지.. 거꾸로 매달려서 눈을 뜬 채로.... 아침에 일어나서 윗층에 달려가보니,.. 정작 윗층은 비어 있는 아파트였다라.... 아아... 이봐요, 꼬마 아가씨들.. 당신들은 인기 연예인이라는 것 때문에 당신들이 무슨 대단한 왕족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은데............“ 원래 자신은 모진 성격이 아니다. 그러니 늘 사람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느 라 스스로도 못 챙긴다. 하지만 기본적인 것은 되어야 한다고, 유신은 잠을 이루지 못하자 본능적으로 날카로워지는 기분에 평소에 친한 그녀들에게 나무라듯 다그쳤다. “이런 일은 경찰에 알리는 게 맞다구, 공주님들. 만약 이런 식의 심한 짓을 당하고도 알리지 않는다면.....“ “.......이 유신 기자님...” “아가씨들이 알리지 않는 이유가 뭔가 밝히기 싫은 과거 때문이라고 사람 들은 오해할거야.” - 어쩌면 그게 사실인지도 모르지- 라고 생각하며 유신은 가까스로 살짝 웃 었다. 기혁의 무릎에 앉아 있다 어깨로 올라탄 꼬마 귀신이 뭔지도 아직 모 르겠는데, 이틀이 지나자 이 아가씨들이 갑자기 GAS로 들이닥쳤다. 꼬마 아 가씨 영혼은 그 날 이후로 보이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더욱 괴기한 인형을 들이대며 아가씨들은 공포에 젖어 있었다. “도와주세요...” 핼쑥해진 모습으로 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율곡이 커피와 녹차를 들고 회의실로 들어오자, 그녀들은 조심스레 눈치를 본다. 가뜩이나 잠을 못자서 기분이 가라앉는데, 인내심을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도와주지. 나야 말로 아름다운 모든 여인들의 수호신이잖아.“ “..............” “그러니 마음놓고 이야기하라구. 정말 off the record 해 줄 수 있어.“ 말 많은 황색 구라 3류 잡지 ‘가쉽과 스캔들(GAS)'에서 무슨 off the reco rd(발표하지 않음을 전재로 취재함) 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 편집부장이 알 면 완전히 제로다, 제로. 모처럼 친절하게 웃으며 말했는데, 아직도 말문을 열지 못한다. 유신은 피 곤한 눈을 굴려 천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니면, 내가 이야기하기 편하게 해 줄게. ........짐작할 수 있는 게 한 가지 있거든.“ “...........?” 불안한 눈으로 열 개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한다. 유신은 율곡의 조용한 눈 빛에 살짝 윙크하며 유쾌하게 말하려 신중을 기했다. 최대한 따뜻하게, 최 대한 마음이 움직이게- “당신들 중에 , 혹시 아기와 관련된 비밀이 있는 사람 있어? 아니면,... 혹시 신체에 관련된 비밀이 있거나... 잘 찾아보면 뭔가 공통점이 있을 거야.. 그런 공통점이 당신들의 비밀인가???“ “.......!!!!!!!!” 둘 중에 하나는 맞힌 것 같다. 적어도 다섯 명 모두가 놀란 눈동자를 크게 뜨며 이 쪽을 응시하니 말이다. 휴우- 갈수록 태산이다. 8. “인형 놀이 좋아해요?” 유신이 자신의 숙소에 들어올 때까지, 기혁은 침대에 누워 책을 보고 있었 다. 두어 달 전의 사건- 그러니깐, 술에 취한 자신과 저 녀석이 뭔가를 저 질렀다는 (그의 말에 따르면 그저 단순한 펠라라는-) 일이 있기 전까지, 녀 석은 자주 그래도 이 방에 들락거렸다. 그러나 근 두 달 동안 녀석이나 자신이나 왕래가 한번도 없었다. 녀석의 아 버지를 비밀스럽게 알게 되니, 더욱 사이가 묘하게 엇갈린다. “좀 누워도 되죠?” 오랜만에 들어온 녀석은, 기혁이 뭐라고 말도 꺼내기 전에 털썩- 침대의 다 른 편에 누워 버렸다. 그리고는 너무나 편하게 눈을 감는다. 기혁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엎드린 채 책을 읽고 있던 자신과, 팔 베개를 하고 똑바로 누운 녀석. “야, 니 방 가서 자.” 떨떠름하게 한 마디 던지자, 녀석이 한 쪽 눈만 겨우 뜨고 웅얼거린다. “내 방에서는 도대체 잘 수가 없단 말이에요.” “그럼 율곡이 방으로 가던가.. 아니면 미경이 선배한테 가. 미경이 선배라면 너 정도는 베개라고 생각하고 잘 잘거다.“ 좀 몰인정하긴 했지만, 사실 그렇게 몰아붙여야 했다. 정말 이 녀석이 유부 남과 불륜에 얽혀 있었단 말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여러모로 얼굴을 보 고 있기가 불편하다. 물론, 그의 아버지가 했던 부탁, 아니 계약도 그렇고. “선배, 어깨 무겁지 않아요?” 그러나 한 쪽 눈만 뜬 유신은 장난스럽게 웃을 뿐이다. 옆으로 빙글 돌아눕 는 바람에, 기혁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부드럽게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유신의 그런 해맑은 농담을 되짚어 본다. 내 등 뒤에 여자가 서 있다- 라는 말을 들은 이후로, 녀석의 저런 장난에 꽤 익숙해진다. 그리 고 요새 사실 몸이 좀 무겁고, 어깨가 지끈하게 아프긴 했었다.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쳐다보자, 유신이 부은 눈으로 작게 웃으며 덧붙인다. “가끔 기지개 펴 줘요. 어깨 무겁고 아픈 데는 그게 최고니깐...“ 기혁은 한 쪽 눈썹만 쓰윽 밀어 올린다. 며칠 전에 유신에 대해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잘 나가는 유명 언론 집안의 아들. 형이 둘이나 있는 괜찮은 성격의 소유자. 남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남자를 좋아하는 게이라는 것 . 그리고, 최근에 5년이나 사귄 사람과 헤어졌다는 것. “뭐 알아낸 거 있어? 시아 이번에는 기절했다며?“ 입술 끝을 말아 올리며 녀석이 웃는다. 잠이 막 쏟아지는 표정으로 옅은 미 소를 띈다. 정말 안쓰러워보여서 이번에는 내쫓지 못하겠다. 이런 영악한 녀석. 얼마 없는 내 동정심을 자극하다니-! “시아, 시아, 시아, 시아.. 지겨워 죽겠네..정말.. 이왕 소개시켜 준 거 좀 잘해봐요, 선배. 경찰에 연락하라고 설득 좀 해요.“ “..................” 이 녀석이 분명히 자신과 내가 잤다고 이야기 했고, 더군다나 가끔 진지한 시선으로 노려봤기 때문에 감정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어색하고 신 경 긁히는 관계였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알았다. 이유신은 따로 마음에 둔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녀석은 장난친 것이다. 시아를 소개시켜달라는 자신 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소개시켜 준 이 녀석은 정말 그렇다. 불륜 비슷하 긴 하지만, 결혼한 남자와 연인이었다고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그러니 이 녀석이 다른 사람에게 진심일 리가 없다. 한마디로 당한 스스로가 바보 일 뿐. 기혁은 여전히 못마땅한 눈초리로 유신을 내려다보며 냉랭하게 말을 잘랐다 . “그래서 공통점이 뭔지는 알아냈어?” 아까 한 무리의 연예인들이 사무실을 다녀갔으니, 유신 정도면 그녀들에게 서 뭔가를 찾아냈을 것이다. 진지하게 묻는데도, 녀석은 잠이 온다고 투덜 거리며 침대에 얼굴을 비벼댈 뿐이다. “여자 아이들은 인형을 좋아하죠... 선배가 더 잘 알텐데요.. 그게 무슨 의미라고 생각해요? 사회적인 현상이잖아요?“ “........인형이라..........” 모처럼 집중하며 기혁은 턱을 쓸었다. 시원하게 잘생긴 유신의 눈이 팅팅 부어 있어서 조금 귀엽다. 하긴, 뭐라고 해도 자신보다 두어살 어리다는 이 점도 있다. “인형 놀이는 대게 어린 아이들의 역할 바꾸기 놀이지. 일종의 사회성을 습득하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여성 성(性)과, 남성 성(性)이라는 섹슈얼리티(sexuality-*성별. 자연적인 것보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의 성적인 정체성을 의미함) 를 익히는 데 유용하다고 해.“ “섹슈얼리티라..... 제가 좋아하는 단어군요. 얼리티는 빼고, 앞에 sex 만...“ 여전히 헤헤거리는 깨끗한 얼굴이었다. 기혁은 그러나 상당히 무덤덤하게 그런 그를 노려본다. “어른이 되어서 어느 정도 인형과 거리를 두는 건, 실제의 자신의 위치나 관계, 그리고 사회적인 지위나 목적의식등을 구체화 시켰기 때문이야. 하지만 성인의 대부분이 어린 시절의 향수 때문에 인형을 좋아하긴 하지. 인형은 일단 가장 닮은 모습으로 만들어질 수 있고, 타인이나 자신, 동물이나 가상의 생명체를 실제로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장 점도 있고.. 무엇보다 또 다른 자아- 라는 인격의 대변이기도 해. 나를 대신할 수 있는 그 무엇이기도 하고... 사람은 자신이 의미를 두는 것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힘이 있지.“ “원시시절의 토템처럼?” 기혁은 토템이라는 단어에 잠시 상체를 일으켰다. 팔이 저릿한 게 같은 자 세로 너무 오래 있었기 때문이다. “말 되지. 토템이란, 대게 한 마을이나 부족의 상징물인데,..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어떤 성질을 구체화 시키는 거야. 옛날에는 마을마다 천하대장군이나 지하여장군이 서 있었는데,.. 그것도 토테미즘에 의거한 하나의 상징이지. 토템이란, 보다 집단화 된 집단 정체성의 대변인이라고들 해. 처음에는 섬기기 위해서 만들어졌고, 그것이 개인화 되면서 일종의 인형처 럼 변화해 갔다는 설도 있고...“ “...그런 이론도 있고?” “또 한편으로, 나중에는 제물의 대신으로 쓰였다는 설도 있어. 처음에 원시 사회에서는 실재하는 사람이나 동물을 신에게 받치는 제물로 삼았다가,.. 나중에 인간의 의식이 발전하면서 사람을 닮은 인형이나 동물을 닮은 인형 을 제물로 받치기도 했지.“ “어쨌든, 반도 못 알아듣겠지만, 실존하고 살아 있는 뭔가를 대신하는 의 미가 크군요.” 그래- 라고 기혁은 기지개를 피며 허리를 일으켰다. 유신이 정말 여기서 잠 들 생각이라면 굳이 말리지 못할 것 같다. 녀석은 지금 한쪽만 눈을 뜨고 보통 때처럼 농담 하는 것도 힘겨워한다. 그것이 문득 기혁의 마음을 불안 하게 만들었다. 흡사,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혼자 인 듯한 사람- 그런 느낌이 불쑥 허를 찌른다. “그래, 알아 낸 게 어떤 거야?” 스스로에게 이는 기분에 당혹해하며 기혁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유신이 파 르르- 감기려던 긴 속눈썹을 억지로 뜨고는 능청스럽게 웃는다. “뭐, 별 거 없어요. 저는 그 다섯 여자들에게 유산이나 이런 과거가 있을지 알았더니...“ “알았더니?” “....그런 건 없어요. 있어도 한 명 정도? 나머지는...뭐..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몇 개 없어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들.. 그 다섯 명의 여자들이 모두 연예인이다,... 그리고 다섯 명이 성형수술을 받았다... 앗, 그렇다면 가슴에 실리콘이 있을까?? 암튼...그리고 다들 최근의 그 끔찍한 인형 때문에 밤잠을 못 이뤘다.. 이 정도? 정말 건질 게 없어요. 가족 관계도 각각이고, 친구들도 다르고...“ 가슴의 실리콘?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지? 유산 이야기는 또 뭐고? “여자 가슴에 관심 있어?” 그렇지 않다고 들었는데- 라고 작고 진지하게 되묻자, 유신이 눈을 감은 채 로 씩 웃었다. “아뇨. 선배의 심장에 관심이 있죠.“ “....................” “그리고 가끔 선배의 어깨를 올라타는 여자 아이에게도요....” “............-!!!!!!!!!!” 갑자기 또 다시 오싹- 한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유신은 뭐라고 욕설을 작게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적어도 30초를 넘기지 않고 그는 그렇게 태연하게 잠이 들어버린다. 정말 피곤했던 것이다. 망할 자식- 사람을 소름끼치게 만들고 저는 잠들어버리다니-!! 생각할 수록 기가 막힌 이유신이다! 9. 아침에 일어났을 때, 기혁은 또다시 어깨가 결렸다. 가볍게 뒷목부터 두드 리며 일어선다. 유신은 세상모르고 곁에서 잠들어 있다. 도대체 뭐가 불면 증이란 말야- 라고 작게 웅얼거리며, 기혁은 파고드는 듯한 유신의 몸을 억 지로 떼어 놓았다. 작게 뭐라고 신음하던 유신이 몸을 돌리며 바로 눕는다. “미치겠네, 진짜.....” 이러다가 이 녀석 계속 여기서 자려고 하는 거 아닐까- 라고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윗옷을 챙겨 입으며, 기혁은 마지못해 이불을 그에게 덮어주었다 . 길고 숱 많은 속눈썹이 얼굴에 드리워져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새근거 리는 숨소리는 정말 흡족할 정도로 깊게 잠든 모양이었다. 오똑한 콧날에서 뚜렷한 인중, 보기 좋은 입술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뭔가를 떠올린 듯 가 볍게 고개 젓는다. 벌떡 일어서서 씻고 내려오니, 아침부터 사무실 가득 커피 향이 퍼져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바로 율곡이 늘 그렇듯 일찍 일어났 다는 사실이다. “잘 잤어, 바른 생활 청년?” 그의 자리로 다가서자, 율곡은 종이를 들여다보다가 힐끗 고개 돌렸다. “유신이 선배 어제 그 방에 갔어요?” “......잠이 안 온다더군.” 뭐라고 해야 하나- 이상하게 율곡의 검은 눈동자는 상대방을 투영해 보는 것 같이 적나라하다. 실상 아무 일이 없었는데도, 강율곡은 무엇이든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자리에 제대로 있 었고,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의 대부분을 알고 있었으며, 또 한편으로 지극히 조용해서 막상 일이 성공하기 전까지는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게 만 들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같은 자리를 지켰다. 한마디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침묵이다. 이런 사이코 같은 녀석!! “커피 드실 것 같아서 더 뽑아놨어요.” 그러나 율곡은 유신에 대해 한마디만 물었을 뿐, 그 큰 키를 느릿느릿 의자 에서 일으켰다. 가뜩이나 마음 복잡한 상태에서, 기혁은 마찬가지로 어깨만 으쓱한다. “뭘 하고 있었어?” 보나마나 할 일은 별로 없을 건데, 앉아서 뭔가 심각하게 들여다 본 까닭에 기혁은 넌지시 물어본다. 율곡이 내미는 머그컵을 받아들자, 손바닥 안으 로 온기가 퍼져갔다. 녀석은 가만히 자신이 보던 스크랩북을 펼쳤다. 율곡 을 대신해서 그의 의자에 앉으며, 기혁은 의문에 가득 찬 마음으로 그가 펼 친 페이지를 들여다본다. “이거, 우리 회사 기사잖아? 따로 오프라인 북으로 스크랩 한거.. 아침부터 왜 들여다보고 있지? 우리 기사에 뭐 문제 있어?“ GAS가 생긴지 벌써 몇 년인데, 또한 GAS의 성격상 문제가 없을 리 없다. 그 것을 알면서도 굳이 물어본 것은, 율곡의 눈빛이 전에 없이 흔들렸기 때문 이다. “어제 유신이 선배가 그 여자들과 인터뷰했었죠? 왜 인형을 받았던 그 연예인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뚫어지게 율곡을 쳐다보았다. 늘어지게 몸을 뒤틀 며 유신이 들어선 것은 딱 그 때쯤이었다. “아아..아쉬워라, 선배. 일어나서 모닝키스를 받기도 전에 가 버리다니.. 흑흑.. 제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아요?“ - 여전한 저 오바 농담들. 막 진지한 뭔가를 말하려고 하던 율곡이 입을 다 물었다. 깨끗하게 씻은 듯한 유신의 얼굴은 조금 눈두덩이가 부어서 조금 우스웠다. 적어도 요 몇 주보다는 말끔해보였다. 잠을 푹 잔 덕에 생기 있 어 느껴진다. “아아....GAS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담은 스크랩북이군.. 이건 왜 보고 있어요, 쪽팔리게? 아, 나도 커피 한잔만, 율곡씨이~“ 뭔가를 말하려던 율곡이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를 떴다. 머쓱하게 다시 스크 랩북을 쳐다보려니, 유신이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같이 내려다본다. “아아... 이건 가연씨 처음 취재했을 때이군.. 한 일년 넘었어요. 이때만하더라도, 가연씨도 시아만큼 예뻤다구요, 선배. 지금은 그 일년 사이에도 성형을 많이 해서 코도 비틀리고, 얼굴도 이상해 졌지만.. 아무튼 어렸을 땐 더 예뻤죠.“ “.......가연씨? 지금도 인기 많잖아.“ “그럼요,.. 다들 예전에는 더 풋풋하고 예뻤어요. 각 신인들이 데뷔할 때쯤의 모습도 많이 담겨 있네요. 하긴, 우리 GAS를 안 거쳐 간 연예인들도 드물죠. 아아... 이건 율곡씨가 처음 썼던 기사다... 하도 이은 문장이 많아서 교정 볼 때 엄청 혼났죠..하하하...“ 잔뜩 심각한 분위기였는데, 유신이 등장함으로 인해 다시 활기차졌다. 율곡 이 체념한 표정으로 머그잔을 불쑥 어깨너머로 내민다. 건성으로 그것을 받 아들며, 유신은 계속 떠들어댔다. “이건 원희씨네. 원희씨도 인기 정말 많죠. 연예부 기자한다고 친구 놈들에게 자랑했더니, 다들 어찌나 싸인 받아달라 고 난리였는지...“ 유신의 어깨너머로 율곡이 기혁을 향해 살짝 눈짓했다. 모처럼 기운 차린 유신이니 용서해주자는 의미인 것 같다. 기혁도 반쯤 포기한 표정으로 같이 웃었다. 어쩔 수 없다. 이유신이 없으면 공간이 삭막해진다는 걸 조금은 인정한다. 자신이 바라보는 동안에도, 유신은 연신 스크랩북을 넘기며 즐거워했다. 기 혁은 그가 떠드는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커피를 홀짝였다. 그쯤이었 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머리를 스쳐간다. 그것은 흡사 반쯤만 차서 출렁거 리는 물처럼 석연치 않은 느낌이다. “잠깐만..........” 기혁은 손을 올려 유신의 입을 막았다. 녀석은 막, 다른 연예인들과 자신의 시시껄렁한 로망을 지껄이던 중이었다. 무척 신난 듯한 그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기혁은 자신의 시선을 사로잡 는 스크랩북 속의 기사를 들여다보았다. “웅웅웅!!!” 입이 막힌 유신이 눈을 크게 뜨며 웅얼거린다. 그러나 기혁은 서둘러 스크 랩북을 넘겨 기사 몇 개를 더 확인하고 잠시 멍한 표정이었다. 이어 유신의 어깨 너머로 율곡의 얼굴을 쳐다본다. 기혁의 표정으로 ‘설마’와 ‘그럼 ?’이라는 두 가지 감정이 상반되게 흘러갔다. “아우- 숨막혀 죽는줄 알았네.“ 기혁이 웅웅거리는 유신에게서 손을 떼어내자, 그는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 런 유신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다만 서둘러 회의실로 걸어간다. 의아한 눈초리로 따라오는 유신과 느릿 느릿 큰 걸음으로 다가오는 율곡도 쳐다보 지 않았다. 그저 박스에 담긴 인형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을 뿐이다. 모두 여섯. 시아를 기절시킨 마지막 인형까지 합해서 모두 여섯 개의 인형이 놓 여졌다. “그러니깐, 기혁이 선배가 나도 모르는 뭔가를 알아냈다는 건가?? 베리 베리 익사이팅걸?” 유신이 스크랩북을 손에 들고 유쾌하게 웃는다. 장난치듯 말하는 그 얼굴에 도, 기혁은 고개 돌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유신의 뒤에 서 있는 율곡을 향 해 이렇게 말했을 뿐. “처음부터 우리가 틀렸어. 그렇지?” 뭐야- 라는 식으로 이번에는 천하의 이유신이 살짝 당황한다. 그는 율곡과 기혁을 번갈아 쳐다보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반면 율곡은 여전히 조용 한 시선으로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기혁은 왜 아침에 율곡이 유신을 찾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왜 G AS의 케케묵은 옛날 기사들을 넘기고 있었는지도. 10. “공통점이 있어, 이유신. 니가 찾지 못한 그 여자들의 공통점..” 기혁은 아직도 영문을 모르는 유신의 경쾌한 눈동자를 쳐다보며 무겁게 말 했다. 한 손에 매직을 든 채로, 그는 화이트보드 위에 재빠르게 갈겨쓴다. 1. 인기탤런트 유가연 - 발목이 잘린 인형. 2. 가수 강유진 - 손목이 잘린 인형. 3. 인기 VJ 손태영 - 가슴이 반쯤 잘린 인형. 4. 뮤지컬 배우로 최근 전업한 전직 가수 이원희 - 눈이 빠진 인형. 5. 신인 인기 가수 장시아- 목이 잘린 인형. “그건 내가 정리한 거잖아요? 나의 과학적 결과를 무단복제하지 말아요.” 유신은 불만스럽다는 듯 커피를 마시며 스크랩북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그 의 그런 불만에도 기혁은 단지 고개를 끄덕이며, 5명의 여자이름 뒤에 ‘공 통점’이라고 적었다. “유신이 네가 말했듯이,... 이 여자들의 공통점은 거의 몇 개 없어. 하나는 모두 연예인이라는 점과, 또 하나는 성형 수술을 한 과거가 있다는 것.. 뭐 이런 정도지. 그런데 말야...“ “................?” “우리가 이 일을 접근하는 방식이 틀렸어.” “뭐가?” 유신이 율곡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야, 너라도 말해봐- 라는 식이다. 그러 나 기혁은 그의 장난에 웃을 기분이 들지 않았다. 인형을 확인하는 순간, 더욱 머리 속이 명확해졌다. “이유신..” “........그렇게 낯 뜨겁게 부르지 마요, 이제 아침인데........” 아아- 라고 짧게 신음하며 기혁은 조금 더 분명하게 입을 열었다. 이 기분 나쁜 예감, 그리고 기분 나쁜 저주. “그녀들의 공통점이 하나 더 있지. 처음부터 우리가 찾아야했던 건 그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공통점....?......” 기혁은 심호흡을 깊게 했다. 서늘한 기분이 늑골을 통과하자, 그 때서야 조 금 가라앉은 목소리가 튀어 나온다. “그래, 다른 공통점.” “무슨 공통점?” “.......GAS라는 공통점.” “..............???” 조금 긴장감이 흘렀다. 기혁은 평상시의 냉정함을 조금씩 찾아가며 서늘하 게 덧붙인다. “그녀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바로 너야, 이유신. 그 여자들은 모두 알고 있지. 너라는 존재를.” “..............-???!!!!!!!!!!” “바로 네가 이 사건의 키워드야.” 뭔가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하자, 유신의 눈동자가 조금 커지다가 이내 어두 워졌다. ‘그런 농담을..’이라고 말하려는 듯, 잠시 입을 열었으나, 그는 이내 양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을 골똘히 노려본다. 기혁은 석연치 않은 기분 들의 해답을 찾듯, 되풀이해서 말하며 보드에 날려 적었다. “너도 알다시피, 난 농담할 줄 몰라. 지금은 그저 한 가지 생각만 들고 있어. 니 입으로 말했듯이, 최근에 이 GAS를 거치지 않은 연예인들은 거의 드물다 ...라고. 그 여자들에 대해선 잊어. 바로 그 여자들 때문에 혼란이 오는 거니깐.. 내 생각에 그 여자들은....“ 보드에 적힌 여자들 이름에 크게 X라고 써서 지우며, 기혁은 돌아섰다. 유 신의 진지한 눈동자가 표정없이 자신을 쳐다본다. 아무런 느낌도 없는 시선 이다. “어제 한 말 잊었어? 신을 불러내기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하지. 인형 말야. 인형은 그냥 도구야. 인형을 받은 연예인들도 그저 도구야. 범인이 원하는 건 다른 사람이야. 다섯 개의 인형을 받은 여자 연예인들은 그냥 제물이었어. 제물을 이용해서 불러낼 사람... 그건 이런 짓을 한 사람이 범죄동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겠지. 너는 여섯 번 째 인형이야, 이유신. 적어도 이 짓을 한 사람은 니가 이 다섯 명의 여자 연예인들과 친하다는 것 , 아니.. 사실은 이런 가쉽거리에 나설만한 GAS의 연예부 기자가 너라는 걸 알고 있 다는 말이야.“ “..........근거는? 선배의 근거는?“ 보다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유신이 물었다. 예리하게 반짝이는 총명한 눈빛 은 여전히 감정없는 그의 놀라운 집중력을 드러낸다. 기혁은 입안의 마른 침을 삼키며, 보드를 두들겼다. “내 근거는.. 불면증, 스크랩북, 그리고 다비드의 별. 인형은 눈가리개 용일뿐이야.“ “.................” “불면증 말야, 이유신. 그 여자들은 인형을 받았기 때문에 불면증이 생겼어. 하지만, 너는 인형을 받지 않았는데도 불면증에 걸렸지. 범인은 몰랐을 것 같아. 너에게 약간의 그..뭐라 그럴까.. 신기라고 해야 하나.. 영적인 능력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너는 인형은 받지 않았지만, 적어도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 거라는 예감을 가진 게 아닐까 싶어..“ “대충 그렇다치구요, 그래서요?” “인형을 받은 사람은 불면증에 걸리지. 인형들은 모두 다비드의 별을 가슴에 달고 있고.. 다비드의 별은 신성한 것이지만, 가끔 무서운 일로 이용되기도 해. 아무 일도 없던 사람이, 불면증에 걸린다는 건 비단 끔찍한 인형을 받았기 때문만이 아냐. ........여섯 명 모두가 잠을 들지 못한다는 건, 일종의 예감이지. 스스로의 몸이 각성시키는 거야. 잠들지 마라- 라고.“ “무엇으로부터?” “..그건 나도 모르지. 나는 그런 쪽으로 잘 아는 사람이 아니니깐.. 하지만 한 가지 정도는 알아. 흑마술이나 부두교,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인형이 저주로 쓰인다는 것 말야. 특히 다비드의 별이라는 육각형의 별은 저주를 강하게 해주는 특징이 있다 고 해. 인형을 받은 사람들이 불면증에 걸렸다.... 그건 인형에 불면의 저주가 아니라, 다른 저주가 걸린 게 아닐까? 무슨 주술인지는 모르지만, 암튼 그런 저주.. 인형을 받은 사람들은 연예인이고.. 아무리 그래도 일반 사람들보다는 높은 영감을 가지고 살아가지. 그렇다면 본능적으로 인형에게서 겉모습 이상으로 뭔가 이상한 기운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을 거야. 스스로가 잠을 자지 않는 거지.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경각심 때문에.... 너 역시 아무 일도 없었는데 비슷한 시기에 불면증에 시달리는 거고...“ 유신은 비교적 침착해보였지만, 장난스러운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는 마치 기혁의 본심을 노려보듯 신랄한 표정으로 돌변해 있었다. “내가 인형을 받을 이유는? 선배 말처럼, 내가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그녀들의 마지막 해답일 이유는? “ “........다비드의 별에는 여섯 개의 꼭지점이 있어. 보통 pentacle이라고 부르는 오각형의 별이 아니라, hexacle 인 육각형의 별이지. 6각형의 별에는 각 꼭지점마다 한 개씩, 그렇게 6개의 희생양이 필요해.“ “오키. 5명이 아니라, 애초의 6명이었다는 설명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겠어요. 어쨌든, 마지막 인형까지 총 6개인데, 받은 사람은 5명이니 한명이 비는 거 지. 그래도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건... 그래서 ‘우연히’ 내가 그녀들과 친하고, 취재했다는 이유만으로 6번째 인 형이다?” “아니.” 기혁은 단호하게 고개 저었다. 이유신이 6번째 인형이다- 라고 생각한 것은 단지 ‘우연’때문이 아니었다. 깊은 숨을 들이쉬며, 율곡이 뒤에서 천천 히 덧붙인다. “그건 유신이 선배가 연예부 기자이기 때문이에요.” “.............내가?” 정말 이유신은 그 순간에 다른 사람 같았다. 그는 뭔가를 확인하듯, 재빠르 게 율곡에게 고개 돌렸다. 기혁은 그가 펼쳐 놓은 스크랩북에서 아까 자신 의 머리 속을 윙윙거리며 지나가던 기사를 꺼내들었다. 율곡 역시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 페이지를 읽었다. 그 페이지에는 유신이 취재한 기사들 아랫단에, 작은 박스 기사로 같은 사건들이 이어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한 그 사건이었다. “선배의 기사 아랫단에 어떤 사건에 대한 박스 기사가 있어요. 취재한 사람은 다르죠. 가장 최근에 선배가 취재한 시아씨 기사 아랫단에... 우리가 궁금해 하는 기사가 실려 있어요.“ “...혹시...그거...” 유신도 불현듯 뭔가 떠오르는 사건이었다. 아이의 납치에 대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잘 기억하고 있었다. 율곡이 소리내어 읽기 시작한다. “한달 전 납치된 것으로 보이는 5세 여아 사건이 장기밀매단의 소행으로 드러났다. 3인조 인신매매범들로 추정되는 범인들은 경찰의 포위망을 피해 교묘히 *** 지역으로 달아났으며, 그곳에서 밀매된 장기들을 입수한 결과 최근 실종된 ****동 여자 어린이임이 밝혀졌다.....“ “..........-!!!!!!!!!!!!!”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기사의 끝이 이렇게 끝난다는 거에요.” “..............?” “...힘든 여정 끝에 발견한 것은 오직 어른들의 이기와 잔인한 습성에 희 생당한 아이의 시신이었다. 아이들을 보호해야 할 사회, 아이들의 미래를 유지해야 할 사회가 그 어린 희생자에게 준 것은 하나의 ‘인형’외에는 아 무 것도 없었다. 공포와 절망 속에서 짧은 마지막을 마감한 희생자는 우리 에게 많은 고통과 과제를 남긴다. 그곳에는 아기의 시신과 인형, 이렇게 둘 밖에는 없었다.....” “...........아....-!” 짧은 탄식조가 유신에게서 흘러나왔다. 율곡은 그런 그를 힐끗 쳐다보며 스 크랩북을 내려놓는다. “어제 밤부터 계속 이 기사가 기억 날 듯 말 듯 했어요. 분명히 유신이 선배가 요새 골머리 앓는 ‘인형’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기사.... 그래서 더 마음 아팠던 기사가 있었는데...라고.. 일어나자마자 찾으러 내려왔더니 이 기사가 있었어요. 두 가지 사건에 한 가지 단어. 그것만큼 서로 연결시키기 쉬운 일도 없죠. 분명히 유신이 선배가 파헤치는 인형 사건과 이 사건이 관계있다고 생각했 어요.“ 벌떡- 유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혁 역시 착잡한 표정으로 일어난다. 많은 사 람들이 이 사건을 대하는 방식이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다. 사람들은 연예인 들이 드러난 스타이기에 공격의 대상이 되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때 론 기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사람들이 알기 원하는 동경들과 영웅, 정보, 범죄 등을 모두 다루면서도 결코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누구 나 그 기사가 누구에 의해 쓰여졌는지는 확인할 수 있다. “잠깐만...그럼, 실제로 이제 위험해지는 건 누구지? 이 아이의 기사를 썼던 사람?“ 한걸음에 스크랩북을 집어 들며 유신은 기자 이름을 확인한다. 어린아이 장 기 밀매를 위한 납치 사건의 취재, 기자는 조미경이었다. “미경이 선배는 지금 어딨지?” 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기혁이 묻자, 율곡이 팔짱을 끼며 쳐다보았다. “2층에요.” “불러!” 입사한 이례 한번도 내지 않았던 무거운 명령조로 다급하게 외쳤다. 11. 긁적 긁적, 그러나 미경은 잠이 막 깬 얼굴로 머리를 긁으며 짜증스럽게 대 구한다. “뭐? 나보고 조심하라구?” 아침이라 잠도 덜 깼는데, 이것들이 일찍 일어나서 무슨 수작이냐는 눈빛이 다. 그러나 기혁은 설명할 시간이나 틈도 없었다. “니가 제일 위험해, 조미경. 이 기사 기억 나?“ “아!...이거.. 당연하지. 입사하자마자 터진 일이었어. 쓴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우리가 3류 황색 언론이라서 그렇지, 이 사건 좀 유명했다구, 굉장히 마음 아팠지.. 일단 아이가 연루된 사건이었으니깐.....“ 긁적 긁적. 잔뜩 헝클어진 머리로 하품을 하며 그녀는 조금 잠이 깬 것 같았다. 율곡이 침착하게 타준 녹차를 건네자, 미경은 한 모금 입에 담고 눈살을 찌푸린다 . “근데, 이 아침부터 웬 일들이래? 자기들이 언제부터 부지런했다구....“ “문제가 생겼어.” 그녀의 졸음을 딱 자르는 듯한 목소리로 기혁이 말했다. 유신도 평상시와는 달리 양미간을 흐렸고, 율곡은 여느 때처럼 침착했지만 눈빛만은 강렬하게 빛난다. “미경아.. 누가 이 일로 우리에게 보복을 하려는 것 같아. 우리..아니, 너에게.“ “...나?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유신은 인형들을 집어 그녀 앞에 늘어놓으며 조금 어 깨를 두들겼다. 아직 피로가 다 풀리진 않은 것 같았다. “이 인형들에 얽힌 일 대충 아시죠? 5 명의 연예인들에게 배달된 5개의 인형들.. 이제 6번째 인형이 도착했고, 6번째 사람이 필요해요. 다섯 개의 인형은 제 주인을 찾아갔는데, 여섯 번 째 인형은 주인을 찾지 못한 거니깐..“ “..........6번째 사람?” “추측하기를... 우리는 그게 나에게 보내진 인형이라고 생각해요. 시아의 방으로 떨어져서, 결국 나에게로 도착하게 만든 거죠. 내가 6번째 인형일 거에요. 조사는 해 봐야겠지만,... 어쨌든, 우리의 결론은 인형이나 인형을 받은 사람은 그냥 미끼라는 겁니다 . 결국, 선배를 노리는 거라고 생각해요. 간접적인 암시는 내가 6번째 인형이라는 거고, 선배는 마지막 인형, 그러니깐.. 범죄의 제물이 될 수도 있다는 거에요..“ “....진짜? 그럼 내가 이 기사를 썼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거야?“ 미경은 담배를 빼물었다. 찌푸린 인상으로 연기를 내뿜으며, 그녀는 거친 목소리로 탁자를 두들긴다. “아, 죽던지 다치던지-! 나는 취재한 대로 쓴 거야. 나도 그 아기가 불쌍했다구!! 딴에는 얼마나 노력했는데! 내가 걔를 납치했어? 내가 그런 짓을 저질렀어? 왜 나를 노린데, 그 십새끼는-!!!“ 그렇지만 그녀 역시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딱히 억울하거나 못마땅하다기 보다는 씁쓸한 표정이었다. 기혁이 슬쩍 눈치를 보내자, 율곡과 유신은 주 섬거리며 일어난다. “야, 다들 어디가?” 회의실 입구를 빠져나가려던 율곡과 기혁이 서로 마주보았다. 감정이 사나 워진 조미경에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기혁 뿐이다. 적어도 동갑이니깐. “니가 말하는 그 십새끼가 누군지 알아보러. 적어도 니가 취재한 그 기사와 관련 있거나.. 희생당한 아이의 가족들이겠지. 이럴 땐 미리 알아서 처리하는 게 좋아.“ 그녀는 불만스럽다는 듯 컵을 쾅-하고 내려놓았다. 율곡이 같이 나가려는 유신의 팔꿈치를 잡아당기며 다시 안으로 밀어 넣는다. “선배는 미경이 선배랑 여기 있어요.” “내가? 내가, 왜????” 오랜만에 기혁이 쓰윽 웃었다. 좀처럼 웃지 않는 자신이지만, 이 순간만큼 은 왠지 아이같이 투정부리는 유신과 미경이 안쓰러웠다. “니가 있어야 미경이가 조금이라도 안심하지.” “웃기고 있네, 꺼져! 다 가버려! 난 집으로 들어갈 거야.” 미경이 빽- 하고 소리지른다. 암, 함부로 보호받는 걸 좋아할 여자는 아니 다. 그럼, 그렇구 말구.. “선배, 안돼요...” 유신이 불안한 목소리로 기혁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울상을 짓는다. 이 상황 에서 무슨 장난질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자, 녀석이 칭얼거리는 아이마냥 쫑 알거린다. “미경이 선배, 나랑 둘만 있으면 근친교배 실험할 거란 말이에요..” “..............???” 시종일관 험상궂었던 분위기에 율곡이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이유를 모 르는 기혁은 손바닥으로 유신의 얼굴을 밀어 회의실 안으로 쳐박는다. 그렇 다, 말 그대로 처박듯이 그 곳을 걸어 나왔다. 12. 어느 새 노을- 차를 타고 이동하는 사이 하루가 거의 훌쩍 지났다. 기혁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인줄을 동원했다. 관공서가 문을 닫기 전에 필 요한 모든 서류를 뽑았다. 아는 인맥이 많아서 좋은 점이 하나 더 있었다. 위기의 순간에 연락할 수 있다는 것. 마지막 서류를 입수하는 순간, 기혁은 차에 올라타며 중얼거렸다. “경찰에 알려 봐도 아무런 효과가 없을 거야. 사실 어린애 같은 주술이 걸려있다고 수사를 해 줄 경찰도 없을 거고..“ 오랜만에 율곡이 차를 몰았다. 그는 기혁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적어도 한 가지 결론은 내릴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아무도 위험하지는 않 았지만, 앞으로는 위험해 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스토커나 정신이상 의 증상들은 몇 가지 단계를 거치는 경우가 많다. 처음의 몇 단계들은 그다 지 위협적이지 않지만, 나중의 단계들은 크게 위험해진다. “일단은 시아씨에게 직접적으로 공격했다는 게 가장 큰 문제가 될 것 같아 .” 기혁이 넌지시 말했다. 자신들의 추측이 틀렸기를 바라지만, 항상 재수없는 일은 이상하게 예감에 잘 맞다. 특히나 이번 일처럼 계획적인 위협들에는. “제 생각에두요. 만약 시아씨의 숙소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미경이 선배도 노릴 수 있어요.“ “유신이는 아직도 미경이 선배랑 같이 있는 거 맞대?” “아까 4시쯤에 미경이 선배 집에 모셔다 드리고 왔대요. 미경이 선배 집에 가족들이 다 있다고 하니깐, 일단 안심할만 하죠. 유신이 선배는 지금 혼자 남아서 다시 잔다고 연락 왔어요.“ “암튼, 그 이상한 불면증은..........” 둘 다 테이크 아웃 커피를 뽑아들고 있었다. 율곡의 커피를 컵홀더에 꽂으 며, 기혁은 간신히 모은 서류와 기사들을 흩어보았다. “아이는 이혼한 엄마하고만 지내고 있었어. 외동 딸이었고...... 이제 겨우 5살이었어. 세상에- 마지막에 발견됐을 땐, 언론에도 공개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고 적어놨 군. 장기가 밀매되었기 때문에, 온 몸이 조각난 상태로 발견됐대.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고.. 아이를 잃은 엄마는 아이의 시신이 발견되고 나서 실어증에 걸렸어.“ “실어증이 아니라, 미쳤다 해도 이해가 돼요. 정말 화가 나는군요.“ “...그래. 인형들이 왜 하나같이 조각나 있었는지도 이해가 가. 아이가 그렇게 죽었기 때문이지.. 나라도 정말....“ 그 때 갑자기 율곡이 대뜸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요... 만약 그렇다면... 왜 마지막 인형은 멀쩡한 거죠?“ “.................?” 기혁은 커피 잔의 종이 끝을 살짝 씹었다. 생각에 집중해 보려 애썼지만, 뭔가 역시 뿌옇게 맺힌 채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율곡의 말처럼 조금 이상하다. 아이의 엄마가 실어증에 걸린 것은 둘째 치더라도 6번째 인형만 은 이상하게 다가왔다. 왜 그 인형만 정상인 걸까? 그것은 그들이 주소에 적혀 있는 희생자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된 의문이었다. 13. “..............-!!!!!!!!!!!” 그곳은 집이었으나, 집이 아니었다. 겉모습은 집이었지만, 절대 집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집이라는 건, 사람의 온기나 체온 그런 것들이 느껴지는 공간을 의미한다. 건물은 집이지만, 내 면은 결코 집이 아닌 곳. 이미 열려 있는 현관에 들어서면서도 기혁은 그 사실을 계속 절감했다. 경 기도 부근의 시골에 위치한 작은 집. 1층짜리 집에는 집처럼 느껴지는 사람 의 기온도, 또한 불빛도 없었다. “우편물이 정말 잔뜩 쌓여 있는 걸? 원래 빈 집인가?“ 기혁은 현관 앞에 산처럼 쌓인 우편물을 주섬 주섬 챙기며 말했다. 몇 가지 우편물을 주인의 허락도 없이 열어보며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율곡이 작 게 고개 끄덕인다. “....여기...좀.. .........심한걸요.” 도착한 시간이 7시 남짓이었기 때문에 더욱 심했다. 관공서를 다 돌고, 사 건에 관계된 다른 기자들을 동원해서 알아낸 이 집의 주소. 그러나 아이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사람도, 혹은 그런 흔적도 없었다. 다만 퇴근시간에 겨우 차를 몰아 도착한 그들은 어렴풋한 어둠과 기이한 괴 기스러움을 느꼈을 뿐이다. 붉은 색 벽돌에 파란기와를 얹은 집은, 너무나 조용해서 숨 막힐 정도다. 끼익- 거리는 오래된 경칩의 소리가 바람에 따라 흔들렸다. 낡은 집은 아니 었지만, 먼지가 자욱이 내려앉아 있었다. “불 좀 찾아봐.” 전원을 찾기 위해 애쓰며 기혁은 발밑에서 걸리적거리는 뭔가를 밟았다. 제 길- 이라고 작게 욕을 함과 동시에 달칵- 율곡이 옆에서 라이터를 킨다. “전원......” 거의 넘어지듯 들어서며 어둠에 익숙해지기 까지 한참 시간이 걸렸다. 스위 치를 찾기 위해 벽을 더듬거리던 율곡의 등이 보인다. 그러나 기혁은 살짝 찌푸린 눈 사이로 다가온 뭔가를 먼저 보았다. 그는 눈동자를 통해 들어오 는 뭔가를 거부하기라도 할 듯 잠시 고개 흔든다. 겨우 불을 찾은 율곡이 달칵- 만족스러운 듯 스위치를 내렸다. 순간적으로 눈앞을 환하게 만드는 불이 거실에 켜진다. “...........-!!!!!!!!!!!!!” 그리고 우뚝- 둘은 동시에 멈춰섰다. 어둠 속에서 본 것이 헛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찰나였다. 뭔가 충격적인 것을 보았을 때 사람들이 흔히 그 러듯, 그들은 또한번 말문을 잃고 잠시 허덕였다. 새파랗게 갈라진 음성처 럼 가까스로 입을 연 것은 기혁이 먼저다. “강율곡.................” 그러나 기혁조차도 녀석의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 덧붙일 말이 별로 없었 다. 이미 그들이 놓친 것, 혹은 잘못 판단한 것의 결과가 눈 앞에 벌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침착한 율곡도 그 때만큼은 격앙된 목소리로 욕설 을 던진다. “이런 제기랄!!!!!!!!!!!!!!” 그들은 틀렸다. 아니, 너무나 앞서 갔거나 너무 뒤에 서고 말았다. 다소 외 딴 곳에 떨어진 어두운 집. 그리고 붉은 빛이 너무나 묘연한 벽돌 들과 열려 있는 문. 거실의 온 구석에 튀어 있는 핏자국과 바닥에 선명하게 그려진 ‘다비드의 별’. 여섯 개의 꼭지점을 가진 별의 각 삼각형 안에는 다섯 개의 조각들이 놓여져 있었다. 배달된 인형의 없어진 부분들이었다. 마지막 여섯 번째 자리에만 다른 것이 놓여 있었다. 기혁이 마지막 6번째 자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뭔가 음산하고 걷잡을 수 없는 피비린내가 발끝을 잡아 끈 것이다. 사람도 아닌 것이 마치 사람처 럼 잡아당기는 두려움이다. 어지러운 판단력이었지만, 그는 조심스럽게 꿈 결처럼 종이 한 장을 들어올렸다. 마지막 자리에 놓여져 있던 건 인형의 부 분들이 아니라 사진 한 장 이었다. “...처음부터 노린 것은 유신이었어.” 유신의 사진을 바라보며, 기혁인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한가지의 의문이 풀렸다. 마지막에 배달된 온전한 인형은 전혀 다른 의미라는 것을. 그 인형이 온전한 이유는, 마지막 인형만은 살아있는 사람이 제물이었기 때 문이었다. 기혁과 율곡은 유신의 사진을 보며 그 사실을 정확히 이해했다. 범인은, 5번째 제물까지는 인형의 부분을 떼어내서 사람과 대치시키려는 것 으로 대신했다. 즉, 5명의 연예인들은 모두 인형이 대신 죽어준 것과 다름 없었다. 그러나 6번째 만큼은 달랐다. 6번째 마지막 인형은 사람 대신이 아 니었다. 오히려 사람이 인형 대신 죽어야 할 차례였다. 그 6번째 인형이 바로 이유신이다. 14. 제발, 제발, 제발-!!! 율곡은 미친 듯이 엑셀을 밟았다. 그러나 아직 정체가 풀리지 않은 서울 인 근에는 차들이 꽉 막혀있었다. 애가 타는 마음에 그는 몇 번이라 핸들을 내 리친다. “처음부터 유신이 선배였어. 미경이 선배가 아니라!!!!“ 내가 왜 그걸 몰랐지-!!!- 라고 자책하듯 율곡은 유리창에 머리를 박았다. 정말 차를 폭발시키고 싶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이성을 잃은 것도 거의 처 음이다. 기혁이 선배나 자신이나, 사실 유신도 걱정되었기 때문에 사무실에 놔두고 온 것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절대 같이 동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왜!!!” 이성을 잃으니 생각이 똑바로 정리되지 않는다. 눈으로 봤기 때문에 유신을 노린다는 걸 알았을 뿐,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유신은 아 까부터 전화를 받지 않는다. 율곡이 아는 한, 사무실에는 지금 유신 밖엔 남은 사람이 없다. 박부장은 출장을 갔고, 마감이 끝났기 때문에 옆 건물에 도 사람이 없다. 근방 몇 미터로도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다. 그리고 연 락이 되지 않는다. 초조함에 입안이 바싹 말랐다. 기혁은 그런 자신을 진정시키는 듯, 조용한 음성이었다. “니가 말했듯이... 5개의 인형이 부서진 이유는, 아이의 영혼을 위로하려는 행위야. 마지막 인형은 살아있는 제물이겠지..“ “...하지만 왜 유신이 선배냐구요!!!! 정작 기사를 쓴 사람은 딴 사람인데....“ 물론 미경도 위험에 빠질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미경이 선배였다면 짐 작이라도 했기 때문에 보호할 수라도 있다. “그래서 우리가 틀렸지. 기사를 쓴 사람이 미경이니깐, 미경이가 타겟일 거라고 생각했어..“ “...................” “..하지만, 잘 생각해봐. 미경이는 그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어.. 자신도 취재를 했고, 마음이 아팠다고.....“ “.....아까 분명히 그렇게 말했죠.” “그래... 잘 생각해봐.. 니가 애 엄마라면 어떻게 하겠어..? 누가 제일 괘씸하겠어? 실종당한 아이... 그리고 관심없는 언론..............“ “..................-!!!” 율곡은 아이를 가져본 적이 없지만, 그 말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정체된 차 안과 부글거리는 마음인데도 불구하고 기혁의 말에 수긍이 갔다. “......언론에 분노하겠죠. 아이의 실종을 일종의 가쉽거리로 만든 언론이나... 혹은...........“ 자신도 답답해 미칠 것 같지만, 겨우 참는 듯한 음성으로 기혁이 고개를 끄 덕였다. “그래.. 내가 아이의 아버지라도 미친 듯이 찾아 헤맸을 것 같아. 실종에서 납치로, 납치에서 살인으로 판가름이 나는 그 시간동안 피가 말리 는 기분이었겠지. 모든 것을 내던지고 아이를 찾는데만 혈안이 됐을 거야. 그럼에도 나의 고통과는 상관없이 늘 희희낙락거리며 굴러가는 세상... 그 어머니에게는 자신의 고통이 가장 큰 문제인데, 누군가는 같은 지면에 고작해야 연예인들의 스캔들이나 소소한 일꺼리들을 말했겠지.“ 서서히 떠올랐다. 율곡이 아침에 기사 스크랩북을 찾아본 이유는 바로 문제 의 구절, ‘아이의 시신과 인형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를 찾기 위해 서였다. 그리고 다들 그 기사에만 너무 골몰해 있었다. 허나 문제의 아이에 대한 기사 위에는 항상 유신의 기사가 있었다. 바로 그 때문에 유신을 6번째 인형이라고 생각했고, 미경이 위험하다고 판단했으니 깐. 그러나 기혁의 말처럼 기사를 쓰기 위해 최선을 다한 미경은 적어도 면 죄부가 있다. 희생자의 가족들에게 가장 마음 아팠던 일은 어쩌면 자신들의 고통을 작은 박스기사로 처리해 버린 GAS. 그리고 언제나 버젓이 아이의 기사 위에 두배나 많은 양으로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유신의 기사들이었을지 모른다. “아이의 어머니는 돈이 없었겠지. ........그러니 광고를 내거나 신문에 알리고 싶어도 많이 알릴 수 없었을 거야. 아까 집만 해도 그랬어. 잘 사는 집으로 보기 힘들었어. 아이의 어머니는.... 자신이 가진 전부를 털어서 적어도 GAS라는 대중적인 잡지에서 아이를 찾아 주길 바랬던 거야.“ “.......국민들에게 여론이 커질수록 아이가 살아 돌아올 확률이 높으니깐 ..” “그래. 하지만, GAS에서는 여느 기사처럼 취급했고,.. 우리 잡지사 특유의 성격답게 연예인들의 뒷담화나 스캔들, 그리고 가쉽거 리를 헤드라인 표제 기사로 실었지. 그럴 때 얼마나 절망할지.. ..........짐작이 가. 통곡과 비명이 가득찬 사람에게 마치 TV의 광대쇼를 보며 웃으라는 강압과 도 같지.“ “.......................” 율곡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 앞에서 붉은 불이 파란불로 바뀌자 미친 듯이 속도를 냈을 뿐이다. 그리고 보다 예리한 음성으로 날카롭게 한마디 던진다. “선배는 유신이 선배가 걱정 되지 않아요?” 자신은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는데, 기혁은 그래도 차분하다. 둘 사이에 서 늘 있던 입장이 바뀐 것 같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자신 쪽이 더 침착했 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다르다. “일부러 유신이 선배를 혼자 남아 있게 만든 거라구요, 이 모든 게! 다 함정이란 말이에요. 처음부터 우리가 미경이 선배를 걱정할 거라고 알고 있었던 거라구요!! 범인이 원하는 대로 유신이 선배 혼자 남겨져 있는데 걱정도 안돼요?“ “.................” 기혁은 한동안 창문 밖을 곰곰이 쳐다보는 눈빛이었다. 속이 바짝 타는 자 신에 비해 그는 끝까지 냉정을 잃지 않았다. 마침내 한참 후에 말문을 열었 을 때도, 그는 여전히 이성적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강율곡.” “........................” “.....아이의 엄마는 근 일년 가까이 실어증이었어. 어떤 것도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충격 받고,... 나는 그게 우리의 책임이기도 하다고 생각해. 유신이나 나나, 그리고 너나.. 뭔가 일차적인 책임을 지지는 않았지만... 그 어머니의 분노가 이해가 가.“ “...................” “나라도 누군가를 대신 죽이고 싶었을 거야. 아니, 사실대로라면.. 나는 내가 죽고 싶었을 거야.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은 그래.. 누구라도 그럴 거야.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그리고 자신의 무기력함과 무능함...“ “....................” “니가 믿는 것보다 유신이는 잘 해 낼 거야. ............그녀는 증오의 게임을 하고 있는 거야. 마지막 제물로 자신이 될 것인가, 아니면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인 유신이가 될 것인가...라고.“ 기혁은 보다 선명한 말투로 율곡을 쳐다보았다. “유신이가 나에게 아이의 영혼이 보인다고 말했어. 지나가는 말로 했다고 생각했지만.. 녀석은 실제로 보고 있었던 거야.“ “...아이를 봤대요?” “..그래. 봤다고 생각해. 내가 유신이를 걱정하지 않는다구?“ 기혁은 정말 단호하게 덧붙였다. 율곡의 흥분한 이성이 정신을 확 차릴 정 도였다. “너에게는 조용히 있는 것이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거냐?” “.....................” “그럼 우리가 그녀의 분노와 뭐가 달라? 그녀는 세상이 자신의 일과는 무관하게 시끄럽다고 생각했어. 세상 사람들이 그녀와 그녀의 아기를 걱정했다는 걸 모르고 있었어. 가끔 사람들은, 자신에게 보이는 세계만 믿어. 하지만,....너는 기자니?“ “.................” “..그래, 나도 기자야. 보이지 않는 것도 이해하려 애써.“ “.................” “..아까 그 집 앞에 쌓여 있던 우편물들 기억해? 내가 지금 손에 잔뜩 들고 탄 게 그 우편물들이야. 넌 화가 나서 챙기지 못했지만,... 이 안에 보면 미경이와 유신이가 보낸 편지들도 같이 들어있어. GAS의 이름으로 배달된 편지들도 있고... 편지의 소인은 납치사건이 시작된 직후부터 계속 돼. 모두가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기 전부터 걱정과 안부의 내용들을 담고 있고. ....... 잡지의 성격상, 그 일은 꼭 헤드라인 기사로 다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모두가 죄책감을 가지고, 실제로 걱정했어. 그걸 보지 않았던 건 그녀야. 마치..... 니가 눈에 보이는 것 외에는 믿으려 하지 않듯이. 나도 걱정해. 미칠 듯이. 하지만, 분노를 삭혀. 분노는 판단력을 녹 쓸게 할 뿐이야. 문제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 니가 잘 알듯이.....“ “......걱정했을 뿐이에요, 선배. 분노한 게 아니라............” “...그래. 알아. 나는 충분히 걱정하고 있어. 정말 충분히..... 걱정을 표현하지 않는다고, 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건 아냐..“ 너는 기자니? 나는 기자야.- 라고 기혁이 말했다. 율곡은 자신의 정체성을 환기시키는 그 런 질문을 처음 들어보았다. 율곡은 기혁이 전혀 다른 선배처럼 느껴졌다. 15. 미경을 보내고 기혁의 방에서 한숨 잔 후에, 유신은 사무실로 내려왔다. 데 스크 탑을 키고, 이리 저리 본사 사이트에 올라온 글에 답변을 달고 있었다 . 따뜻한 커피 한잔과, 고즈넉한 초겨울의 밤- 조금 추운 기분이 들어 히터를 높여 놓는다. 오전 중에 나간 다른 맴버들이 이제 곧 들어올 시간이다. 배가 고팠지만, 유신은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싶었다. 마치 기혁 본인처럼, 자신에게 안정을 준 기혁의 방은 잠들기에 딱 좋았다. 유신은 한잠 늘어지게 잔 기분으로 기지개를 피며 마우스를 돌렸 다. “..............?” 그때 문득, 모니터 화면에서 작은 산란이 일어났다. 모니터를 이루는 전자 파들이 작게 흔들린 것이다. 일시적인 통신장애라고 생각하며 유신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다시 크게 몸을 피며, 긴 다리를 접고 기사들을 읽고 있었다. 그 때 탁- 하는 작은 소리가 들리며 순간적으로 정전이 일어난다. “...........골고루들 하네...” 유신은 양미간을 찌푸렸다. 눈 앞이 컴컴한 까닭에 이번에는 책상 위에 올 려진 노트북의 전원을 킨다. 노트북만은 건전지가 남아 있어서 적어도 30분 이상은 버텨줄 수 있다. 그는 한 손으로 노트북 전원을 키며 책상 서랍을 열었다. 어딘가 손전등이 있을 것이다. 건물 입구에 배치된 두꺼비 집을 열 어볼 생각이었다. 보나마나 전원 차단기가 내려갔을 터이다. 전기를 많이 쓰는 건물이다보니, 누전이나 과잉 전류가 원인일 것이다. 손바닥안에 걸리는 손전등을 확인하며 그는 굽힌 허리를 일으켰다. 경기도 인근의 GAS건물은 어딘가 전원주택 같아서 조용하고 안정적이지만, 가끔 이 럴 때 소름끼친다. “...........-!!!!!!!!” 그리고 그는 잠시 얼어붙었다. 두렵기 보다는 뭔가 심상치 않은 생각이 기 를 억누르게 만든 것이다. 노트북은 예상대로 켜져 있었다. 밝은 흰색 화면 이 나타나고, 바탕 화면에 차르륵- 작은 아이콘들도 제대로 들어와 있었다. A4보다 작은 화면이지만, 그래도 주변을 조금 밝힐 정도의 크기는 된다. 그러나 자신이 놀란 것은 노트북의 밝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노트북 모니터가 아니라, 그 옆의 PC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불이 꺼진 모니터 였지만, 옆에서 발광하는 노트북의 빛 때문에 검은 모니터는 일종 의 흐릿한 거울처럼 자신의 등 뒤를 비춰준다. 그곳에는 자신의 어깨가 실 루엣처럼 담겨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의 모습도 환영처럼 그림자로 담겨 있었다. “............넌 누구니?” 등 뒤에 선 누군가를 향해 유신은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본 채 묻는다. 그 것은 아이었다. 이전에도 기혁의 무릎에 앉아 있던 그 아이. 그리고 이번에 는 자신의 뒤에 서서 가만히 이 쪽을 쳐다보고 있는 그 아이. 한 두 번 귀신을 본 것도 아니지만, 이렇게 불쑥 나타나다니 놀랍다. 유신 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며 눈을 감았다. 속으로 열을 세고 눈을 반짝 뜬 순 간,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넌 누구냐니깐...” 혼잣말로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유신은 크게 한숨을 쉰다. 어둡고 으쓱한 밤 , 아무도 없는 건물, 불 꺼진 공간- 밀폐된 곳의 습습한 기운이 하고 올라 왔다. 유신은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난 몇 가지 역경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보다 더 참혹한 귀신도 몇 번 보았고, 그 때마다 그는 충격을 받 던 것에서 점점 불쌍하다는 생각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자신의 주변에 본격 적으로 나타난 영혼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아이는... 아마도 인형 사건에 관계된 아이라고 생각하며 유신은 천천히 다시 컴퓨터 쪽을 향해 몸을 돌린다. 이 노트북이라도 켜져 있는 동안에 어서 밖으로 나 가야겠다. 그러나 그 때 훅-... “..........-!!!!!!!!!!” 돌아본 노트북 모니터 안에서 아이의 얼굴이 튀어 나왔다. 무표정하고 차가 운 눈빛, 하얗고 핏기없는 얼굴과 파랗게 얼어붙은 입술, 헤집어진 인형을 엮은 듯 참혹하기 그지없는 살점들. “..............아...” 유신은 뒷걸음 쳤다. 언제나 자신은 죽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다고 믿었다. 스스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아직도 현세에 남 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아이가 나탔을 때는 그도 당황했다. 죽은 사 람이 산 사람을 해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심장이 툭- 하고 내려앉 을 정도였다. 귀신들은 자주 나타났지만, 의례 자신을 싫어했다. 기혁처럼 영감은 없지만 , 귀신들이 잘 붙는 몸이 있는 반면에, 영혼들은 유신에게 보이기만 할 뿐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이 아이만이 다를 뿐이다. 순간적으로 유신은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일단 가슴을 진정시키고, 그는 거친 호흡을 삼킨다. 조금씩 말라가는 입을 열어 뭔가 달싹거리려 애썼다. 아이의 환영은 아직도 모니터 안에 있었다. 그는 과학도였던 자신을 떠올리며, 저것은 그냥 에너지일 뿐이다- 라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그 때였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이는 홀로 남아.......... 집을 보다가..... “............-!!!!!!!!!!” 노래 소리가 들린다. 마치 아이를 재우는 듯한 흥얼거림이 귀전에서 똑똑히 들렸다. 유신은 드디어 깨달았다. 이 건물 자체가 귀신의 집처럼 변해버렸 다는 사실을. 바다가 불러주는.............자장 노래에.................. “...꼬마야.....” 스르륵- 아이의 피묻은 하얀 뒷모습이 이번에는 문가에서 나타났다 사라진 다. 어두운 공간 안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작은 뒷모습. 유신이 부르기도 전 에 문 뒤로 사라져 버린 아이의 혼령. 그리고 달칵 달칵- “....................” 문고리가 흔들린다. 유신은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만약 기혁이나 율곡이 돌아왔다면 그들은 훨씬 인간적인 소리를 내며 돌아왔을 것이다. 건물 밖으로 차가 도착하는 소리를 포함해서. 그러나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창문에 부딪치는 차가운 바람 밖에는 없다. 마치 사람의 입김처럼 서늘하게 몇 번 창문을 두들기는 바람소리. 그리고 여전히 누군가 문을 열 듯 달칵거리는 작은 소리. 달칵 달칵. “...................!!!!!!!!!” 덜컹- 하며 문이 열렸다. 자신의 자리에서 물러서서 뚫어지게 쏘아보고 있 는 동안 마치 누군가 힘차게 열 듯, 문이 크게 열렸다. 그러나 문 밖으로 보이는 어두운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내림과 동시에 그는 문 앞에 서 있는 다른 것을 보았 다. 자신의 반도 되지 않는 인형. 그것은 발목까지 잘려 있는 첫 번째 인형 이었다. 인형은 가는 웃음을 띄고 있는 산 사람처럼 그 앞에 서 있었다. 투명하고 검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유리알처럼 쳐다본다. 유신은 다소 멍해진 기분 으로 인형을 쳐다본다.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죽어 있는 것도 아닌 듯한 인 형이다. 마치 제 발로 걸어나와 문을 열었다는 듯, 고글 고글한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덮은 생생한 인형이 가늘게 웃고 있었다. 피투성이의 인형이 웃 고 있는 모습을 보자, 유신은 솜털이 서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노래가 들린다. 그것은 유신이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노래였고, 음 산한 목소리였으며, 느릿 느릿하게 사람을 늪으로 잡아끄는 듯한 공포같은 주문이었다. = 첫 번째 인형이 문을 엽니다... 돌아다니지 못하게 발목을 잘라줘.... = 유신은 드디어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뭔가 석연치 않은 쭈삣한 두려움. 그것이 자신을 죄여오려 애쓴다. 그러나 그는 머리를 저으며 인형이 서 있 는 곳까지 걸어갔다. 너는 그냥 인형일 뿐이야- 라고 작게 속으로 되내인다 . 같은 노래가 다시 흘러나왔다. = 첫 번째 인형이 문을 엽니다... 돌아다니지 못하게 발목을 잘라줘.... 두 번째 인형이 살려달라고 매달립니다.. 애원하지 못하게 손목을 잘라줘....= 쿵- 하고 첫 번째 인형을 지나가는 순간, 천정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훅 ‘- 짧게 숨을 들이키자, 두 번째 인형이 보인다. 눈 앞에 뎅그르르 웃고 있는 인형. 손목 짤린 두 번째 인형이 사람을 안으려는 듯한 잣로 거꾸로 떨어져 내렸다. 마치 그 밤에 시아에게 나타난 인형처럼 유신의 얼굴 바로 앞에서 데롱거리며 표정없이 웃는다. = 첫 번째 인형이 문을 엽니다... 도망가지 못하게 발목을 잘라줘.... 두 번째 인형이 살려달라고 매달립니다.. 애원하지 못하게 손목을 잘라줘.... 세 번째 인형이 통곡합니다... 사랑하지 못하게 가슴을 파헤쳐.....= 심장이 역하게 뛰어 올랐다. 캄캄한 복도위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사람의 절 반 정도도 되지 않는 인형들이다. 그러나 누군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유신 은 직감적으로 자신이 이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누군 가 공포감으로 자신을 조정하려는 덫이다. 그러니 말려들지 않아야 한다. 어두운 밤, 아무도 없는 밀실, 차가운 공기, 증오를 드러낸 인형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것은 살아있으며 자신을 관찰하는 시선. 어둠 속의 눈동자. 덜컥- 세 번째 인형이 발에 걸렸다. 복도 안 쪽 컴컴한 곳에 매달린 세 번 째 인형은 가슴이 도려내져 있다. 유신은 상반신을 들썩이며 숨쉬려 애썼다 . 손에는 손전등을 꽉 쥔 채로, 그는 낮고 음침하게 웃는 듯 낄낄거리는 노 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흐느끼는 것처럼, 어쩌면 반쯤 신음하고 우는 것 처럼 들려오는 목소리.. = 첫 번째 인형이 문을 엽니다... 도망가지 못하게 발목을 잘라줘.... 두 번째 인형이 살려달라고 매달립니다.. 애원하지 못하게 손목을 잘라줘.... 세 번째 인형이 통곡합니다... 사랑하지 못하게 가슴을 파헤쳐..... 네 번째 인형이 돌아봅니다.....= 노래소리는 회의실 쪽에서 나고 있었다. 인형들이 회의실 박스에 담겨 있었 으니, 아마 그 안에 범인이 숨어 있으리라 여겨졌다. 유신은 두근거리는 심 장을 억누르며 인형들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기혁의 말처럼 뭔가 불길한 저주가 담긴 인형들이다. 그들이 살아서 걸어온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눈 빛에 담긴 그 섬뜩한 기운을 지우기 어려웠다. 네 번째 인형이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회의실 문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인형은 눈이 없었다. 눈이 있 던 자리는 허옇게 비어 있었고, 웃고 있는 듯한 또렷한 입매가 유신의 심장 을 꿰뚫듯 자리 잡을 뿐... = 첫 번째 인형이 문을 엽니다... 도망가지 못하게 발목을 잘라줘.... 두 번째 인형이 살려달라고 매달립니다.. 그 애원하는 손목을 잘라줘.... 세 번째 인형이 통곡합니다... 너는 사랑받지 못해..그 심장을 파헤쳐..... 네 번째 인형이 돌아봅니다.....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눈을 도려내.... 다섯 번째 인형이 회상합니다..... 기억치 못하게 될 거야... 머리를 끊어내....= 덜컹 덜컹.. 문 고리에는 다섯 번째 인형이 걸려 있었다. 머리 없는 인형이 목부터 매달 린 채 피투성이로 데롱거렸다. 바르르- 전혀 그런 일 없던 자신의 손끝도 떨린다. 유신은 간신히 인형이 달려 있는 손잡이를 잡았다. 조금 열린 채 덜컹거리는 회의실 손잡이. = 여섯 번째 인형이 걸어옵니다...................= 후우- 라고 길게 숨을 토한 채, 유신은 문을 휙- 잡아 당겼다. 손전등을 왼 손에 잡은 채로 앞을 정면으로 쏘으며.. = 여섯 번 째 인형이 걸어옵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깜박였다. 심장이 쿵쿵- 머리 속을 두들기고 계속 반복되 는 노랫말이 뇌를 점령했다. 여섯 번 째 인형이 걸어옵니다........... “..............-!!!!!!!!!!!!” 컴컴한 회의실 안에는 사람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여자인 듯 보이는 산 발한 머리가 땅끝에 거의 닿을 듯한 자세로 달려 있었다. 투둑-하고 조금씩 떨어지는 핏방울들이 바닥에 잠겨 있다. 어두운 곳에서도 그녀의 몸을 타 고 흐르는 핏줄기들이 보인다. 많이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눈을 감고 흔들 거리는 모습이 어쩌면 죽은 건지도 몰랐다. = 여섯 번 째 인형이 걸어옵니다...................= 그리고 여자의 머리 맡에는 작은 녹음기가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라 짐작되 는 낮고 음산한 노래가 같은 부분에서 달칵거리며 씹힌 테이프 마냥 흘러나 온다. 여섯 번 째 인형이 걸어옵니다............. “...........이봐요..” 유신은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추며 그녀 곁으로 다가섰다. 누군지 모르는 사 람이다. 딱히 이 곳에서 자살할 사람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 자는 온 몸이 상처 투성이었고,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머리채에 뒤 덮혀 있다. 발목을 묶은 두 개의 끈을 이용해 거꾸로 매달려 있었고, 늘어 진 팔이 꼭 죽은 사람마냥 바닥에 흐느적거렸다. 흔들흔들거리는 커다란 사 람의 모양은 사람을 공포로 몰아가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어두운 밀실 안의 피비린내와 음습한 살기도 그만큼 심장을 죄어왔다. 갑갑하게 흉부를 억누르는 공기를 털어내며 유신은 여자 곁으로 다가간다. 아무래도 죽었거나 기절한 것 같았다. 아까부터 통신이 안 되는 핸드폰 때 문에 119를 부를 수도 없었다. 그는 다만 손전등을 여자의 괴이한 얼굴에 비추며 숨소리라도 확인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조금 몸을 가져다 댄다. 그 때였다. “....................!!!!!!!!!!!!!!” 기절한 줄 알았던 여자가 눈을 번쩍 뜨며 유신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그 는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 여자의 눈동자는 광기로 이미 번뜩였고, 괴기 하고 격렬한 숨소리만이 지배할 뿐이다. 머리카락을 잡은 손은 남자이상으 로 강한 힘이었다. 유신은 여자의 얼굴과 맞붙을 정도의 거리까지 끌어 당 겨진다. 숨을 쉴 수가 없을만큼, 심장이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곁에 있는 녹음기에서는 아까부터 머리를 돌게 만들던 그 이상한 노래가 계 속 같은 구절에서 반복하며 달칵거린다. = 여섯 번 째 인형이 걸어옵니다...................= 여자가 씨익- 웃었다. 유신은 자신의 목 위로 돋는 소름을 느끼며, 날카롭 게 긋는 칼날을 깨달았다. 차가운 금속성 칼날이 자신의 목을 가늘게 긋는 다. 살아있지 않는 것처럼 부릅뜬 광기의 눈을 반짝이던 여자- 그녀가 귀신 처럼 웃으며 낮게 중얼거린다. “여섯 번 째 인형이 걸어옵니다.................” “..............!!!!!!!!” “.......너는 내 마지막 인형.......나와 같이 죽어줘..............라고. .” “..............-!!!!!!!!!!!!” 그곳에는 여자와 자신, 이렇게 둘 밖엔 없었다. 16. 차의 시동도 끄지 않은 채, 둘은 뛰어 내렸다. 정전인 것처럼 불이 나가 있 는 건물- 율곡과 기혁은 이미 공포의 기운을 감각적으로 느낀다. 뭔가 끔찍 하고 서늘한 바람 때문에, 건물 안이 건물 밖보다 더 추웠다. “전원-!!!!!!!!” 어두운 계단을 연거푸 뛰어 오르며, 기혁은 율곡을 향해 소리쳤다. 늘 오르 내리던 건물이어서 그나마 익숙한 게 다행이다. 컴컴해도 간신히 넘어지지 않으며 두 사람은 함께 사무실 쪽으로 뛰어 들었다. 그러나 두꺼비 집은 전원 차단기가 내려져 있지도, 혹은 불이 나가있지도 않았다. “디스펄스............” 율곡이 중얼거린다. 이전에 K 고등학교 때도 이런 단어를 말했었다. 간신히 라이터를 키며 발걸음을 옮기자, 이상하게도 복도 끝에 가지런히 나와 있 는 인형들이 보였다. “...유신이가 인형을 꺼내 놨을까?” 기혁은 스스로 꺼낸 말에 고개 저었다. 아니, 이유신이 미치지 않는 이상은 인형을 저렇게 밖에 꺼내 놓을 리가 없다. 인형들은 회의실에서 막 나온 것처럼 박스에 담긴 채, 복도 끝에 놓여 있었다. “..........유신이 선배가 아니라면, 누군가 딴 사람이 꺼내 놨겠죠...” 그 때 회의실 쪽에서 부시럭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율곡과 기혁은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사무실에서 없어진 한 사람, 그리고 원래의 자리에서 나와 있는 인형. 기혁이 조심스레 턱으로 회의실을 가리켰다. “...강율곡..” “...................” “....주차장에 내려가서 저 인형들 태워버려.” 처음부터 이상한 인형들이었다. 아까 그 집에서 저주와 제물에 쓰인 인형들 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소름끼친다. 율곡이 간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박스 를 집어 들었다. 기혁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켜 ‘쉿’하는 듯한 동작을 하며 혼자 살그머니 회의실 쪽으로 걸어간다. 누군가 저 방안에 있다! “................_!!!!!!!!” 그리고 기혁은 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며 거꾸로 매 달려 있었다. 귀신이나 괴물처럼 보이는 그 모습에, 기혁은 소리가 윽- 하 고 목에 걸렸다가 안으로 들어간다. 그 여자였다. 분명히... 아이의 엄마, 그리고 유신의 머리카락을 쥐어 잡으며 목에 칼을 댄 채 얼굴 을 붙인 저 여자..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이곳에 도착했다는 것을 모르는 듯 보였다. 이미 광 기에 사로잡혀, 그녀에게는 유신과 자신, 그리고 인형들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 보였다. 자신에게 유신은 옆모습 밖에 보이지 않았다. 부드러운 머리 카락이 그녀의 손가락에 잔뜩 잡혀 있었고, 매끈한 목 위로 섬칫한 칼날이 달빛을 받아 반짝인다. 그녀는 단번에 목을 그을 듯, 힘차게 손을 올렸다. 그러나 질끈- 눈을 감는 유신을 보자, 만족스럽다는 듯 낮게 칼칼한 웃음을 뱉는다. 기혁은 가슴이 철렁- 하고 내려앉았다. “이유신................ 니가 없어져도 사람들은 내일이면 다시 웃으며 생활할 거야............“ “...............” “마치, 우리 아이가 없어졌는데도, 니가 그런 기사 따위나 적고 있었듯이. ...............” “...............” 기혁은 어떻게 하면 여자에게서 유신을 빼내올지 긴장하고 있었다. 저 여자 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그렇다면 웬만한 장정들보다 초인적으로 힘이 강 할 것이다. 유신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처음엔 혼자 죽으려 했지...............” “................” “너 같은 속물은 몰라.... 아이를 잃는다는 게... 그렇게 비참하게 보내야 한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 "..나는 내 아이의 시신을 내가 꿰매었지.......... ......크크큭........ ....니가 사랑하는 사람이 너를 꿰맬 수 있게 만들어줄게.............. 그럼 아무도 고통스러움 가득한 이 세상에.. 더 이상 너 같은 기자가 나오길 바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여자가 갑자기 큰 웃음을 터뜨렸다. 성대가 끊어진 듯 갈라지는 날 카로운 웃음소리가 밤에 울리는 동안, 기혁은 소름이 척추를 타고 흐른다. “걱정할 필요 없어........이유신....” “..............” “너만 죽는 게 아냐... 나도 이미 죽어가고 있지.... 그리고 그 다섯 년들도 똑같이 죽을 거야.................“ 눈을 감고 있던 유신이 반짝- 시선을 열었다. 유신과 여자는 서로를 노려보 듯 쳐다보았다. 내내 한마디 없던 녀석이 말문을 연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 “어떻게..? 당신이 가고 나면, 누가 그 애들을 죽이지?...“ 여자는 비웃듯 더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유신의 목 위로 칼끌을 천천히 누르며 음산하게 속삭인다. “내가 할 일 없이 그런 걸 보낸 줄 아나....” “..................?” “그 인형들에는 내 피가 묻혀 있어... 저주와 증오가 가득한 피지... ....주술을 담기 위해선 피가 필요했거든....“ “...그러니깐 무슨 주술..............?” 여자가 희번뜩 거릴 정도로 눈을 부라리며 즐겁게 외쳤다. “인형의 꿈-!! 잘 들어, 이유신.. 너는 너 자신도, 그리고 그 여자애들도 보호하지 못해............... 니가 사랑하는 그 시아라는 계집도..... 아무도 살려낼 수 없을 거야..........“ “..................” “꿈 속에 인형을 보면 그건 자기가 죽을 꿈이라고 하지.............. 흉몽이야, 흉몽.......... 나는 내 아이가 죽는 날, 인형의 꿈을 꿨지.... 내가 죽어야 하는데, 왜 내 아이가 죽었을까... 언제나처럼 아기를 혼자 집에 두고 나가는 게 아니었어............ 그 날 범인들이 노린 건 내 아기가 아니라, 나 였는데...... 왜 내 아이가 죽어야 해...“ 여자는 횡설수설거리고 있었다. 그 때 어둠 속에서 유신이 잠깐 고개를 돌 렸다. 문 앞에 서 있는 기혁을 보는 듯, 그는 눈을 돌려 한동안 쳐다보았다 . 일단, 그 시선이 지나치게 조용하고 침착해서 기혁은 안심했다. 유신이 눈을 감고 있었던 건 포기하고 있던 게 아니었다. 그저 진정하기 위한 것일 뿐. 기혁은 몸을 낮게 움츠린 채 기어 들어가기 시작한다. 여자는 번뜩이는 눈 동자로 유신만을 쳐다보기에 바쁠 뿐이다. “인형들에 같은 주술을 걸었지.... 인형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그 인형이 나오는 꿈을 꾸게... 천천히, 스스로의 죽음을 직감하면서도 빠져 나갈 수 없는 고통을 주는 거 지.. 그게 바로 공포야...“ “.................아니. 그건 살인이야.........” 유신이 드디어 여자에게 대답했다.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녀는 손목 을 부들거리며 아귀에 힘을 주었다. 기혁은 그녀의 등 뒤로 조심스레 다가 가며 유신에게 눈짓을 했다. 여자를 자극하는 말은 금물이다. 그러나 분노 로 부들거리는 여자를 똑바로 노려본 채, 유신은 침착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덧붙인다. “당신이 모르는 비밀을 세 가지만 이야기 해 줄게... 당신 말처럼 어차피 우리 둘 다 죽을 목숨이니깐...........“ “............닥쳐........” “...죽을 사람에게 마지막 말 정도의 아량은 베풀어..” 믿을 수 없다. 유신은 심지어 살짝 웃었다. 부드럽고, 어딘가 모르게 절절 한 미소. 그리고 아파보이는 시선이었다. 기혁도, 그리고 기혁에게 등과 뒷 모습만 보이는 여자도 잠시 멈칫하는 순간이었다. “첫번째 비밀은... 내가 사랑하는 건 시아가 아니라는 거야.. 아쉽게도.. 내가 오해를 살 정도로 시아에 대해 좋은 기사를 쓰고, 따뜻한 기사를 썼던 건....“ “................!!” “...바로, 당신의 아이가 살아서 계속 자랐다면, 그런 여자가 될지도 모르 기 때문이야.... 사람은 누구나 자라면서 성장하니깐.. 자신을 바라봐주는 시선만큼 아름다워지지.. 겉모습이나........그리고 속 마음이나.............. 나는 그 기사를 읽는 모든 사람들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세상 시름을 잊고 즐거운 기분으로 충전되기를 원했을 뿐이야....“ 여자는 일순 진정한 것 같았다.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신이 말했다. “두 번째 비밀은... 나는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을 보고 살았어. 당신처럼,....나도 어릴 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지. 당신에게 아이가 필요했듯이.. 나에게도 엄마가 필요했어. 하지만 엄마는... 내가 당신의 아이만했던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난.. 어린 마음에 엄마를 보고 싶다고만 생각했어.........“ “...................” 여자의 손 끝이 조금 떨렸다. 유신의 목소리도 아주 약간 떨렸다. 마치, 그 리운 뭔가를 회상하듯, 간절한 목소리였다. “밥도 먹지않고... 잠도 자지 않고 생각했지.. 엄마를 한번만 더 만나게 해 주세요...라고. 그러면 두 번 다시 속 썩이지 않을게요.. 유리창을 깨서 엄마가 소리를 지르게 하지도 않을게요... 아빠랑 싸워서 엄마를 아프게 하지도 않을게요... 어버이 날이 되면 더 예쁜 꽃을 만들어 드릴게요.. 편식을 해서 엄마를 찡그리게 하지도 않을게요.... 김치도 잘 먹고... 된장국도 잘 먹을게요.. 엄마를 한번만 보게 해 주세요............라고.“ “..................” “나는.... 정말 엄마에게 사과하고 싶었어... 엄마가 아파서 쓰러지던 날, 엄마는 혼자였거든... 나는 남자인데 말야.......... 엄마를 지켜주지..........못했어...“ “...............” “한마디만 하고 싶었어, 한마디만. 당신이 그렇듯.. 나도 한마디면 족했어. 당신이 당신의 딸에게 단 한마디만 하고 싶듯.. 나도 그랬어!!!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게 다 였는데.. 그 날부터 내 눈에는...“ “...............” “...다른 사람들만 보였어. 죽어버린 다른 사람들의 마지막 모습들이 주로 보였지... 당신........그거 알아? 난 죽은 사람들을 봐. 믿지 않겠지만.... 정말 그래............ 난... 엄마만 보고 싶었을 뿐인데.. 엄마는 한번도 보지 못했어.. 대신............“ 유신이 갑자기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손바닥을 붙였다. 여자 의 몸이 잠시 흔들린다. 그러나 주의를 놓지 않고 여자는 칼 끝을 더욱 세 워 유신의 목을 파고들었다. 약간의 피가 배어 나온다. 개의치 않고 유신은 울음이 날 것 같은 웃음을 띄였다. “대신......... 나에게 당신의 아이가 보여...........“ “...............-!!!!!!!!!!!” “하얀 옷을 입고, 당신의 말처럼 처참한 모습이지만.. 당신의 아이도 당신을 찾고 있었어.. 죽기 전의 마지막 바람이었겠지.. 그리고 아이는 만족해.. 엄마를 만났으니깐.. 당신 알아.........? 저 아이는 내 눈에 보인 이례로 처음 웃었어. ...엄마니깐 더 잘 알고 있겠지.. 아이가 웃을 때... 보조개가 보여....“ “..............-!!!!!!!!!” “난.... 당신이 나를 어떻게 죽이던 상관없어.. 하지만.. 적어도 애가 보는 앞에서 엄마가 살인을 하는 것만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거짓말이야!!!!!!!!!!!!!!!!!” 여자가 크게 동요했다. 그녀는 절규하듯 비명을 지르며 칼을 높이 들었다. 한번에 밸 듯한 자세였다. 기혁이 재빠르게 여자의 팔을 잡으려 몸을 날린 다. 그러나 유신이 마치 자신도 광기에 전염된 듯한 힘으로 여자의 팔목을 잡았다. “놔!!!!!!!!!!!!” “.....정말 보여!!! 당신이 믿던 안 믿던 상관없어! 날 죽이려고 하든 말든, 그것도 상관없어!!!!!!!!“ 여자의 흔들리는 몸을 기혁이 잡고, 유신도 잡았다. 심장이 두근거릴 것 같 은 이 긴장감에도 그러나 유신은 여자를 진정시키듯, 피투성이 머리카락을 꽉 잡아 얼굴을 마주하며 외쳤다. “그래, 난 거짓말쟁이가 맞어! 저절로 농담이나 거짓말만 하게 됐지. 아무도 내 말을 안 믿어줬으니깐!!! ........당신도 안 믿어. 우리가 똑같이 미쳤다는 걸........“ “......놔!!!!!!! 죽어야 해, 전부... 전부 죽여 버릴 거야!!!!!!“ “당신은 아무도 못 죽여...........” 갑자기 유신이 여자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기혁이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비 틀어 칼을 빼 든다. 여자는 이미 자해의 흔적으로 온통 피투성이었다. 기혁 이 탁자를 타고 올라가, 여자의 발목에 묶인 줄을 빼는 동안, 보다 침착하 고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유신이 여자를 진정시킨다. “난.............당신처럼 끝까지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 ....나도 당신처럼.. 엄마가 살아있을 때, 놀러나가지 않았다면 엄마를 잃지 않았을 거야...“ 기혁이 줄을 다 놓을 때쯤에 문득 번쩍- 불이 들어왔다. 컴컴한 곳에 익숙 해 있다가 눈앞이 아릴 정도로 밝은 형광등이다. 여자가 풀썩- 인형처럼 유 신의 품 안에 떨어진다. 아래에서 받치고 있던 유신 때문에 그녀는 안전하 게 땅으로 낙하했다. 민첩하게 기혁이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 다. 그리고 천천히 깨달았다. 유신의 품 안에 안긴 여자는 조금씩 흐느끼고 있 었다. 마치 아기를 달래는 것처럼 유신은 작게 중얼거린다. “세 번째 비밀을 알려줄게... ........가장 큰 용기는...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거야.............. 나도 아직 많은 것들을 용서하지 못했지만... 자기 자신만큼은 용서하는 게 좋아.......“ 가느다랗게 정신을 놓는 듯한 여자가 천천히 오열하고 있다. 기혁은 어느 덧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한 그녀에게 안도를 느끼며 창 밖으로 다가선다. 주차장에서 율곡이 피워놓은 불이 건물 앞을 밝혔다. 유신은 마치 다 큰 아기처럼 축 져진 여자의 몸을 힘껏 안고 있었다. 산발 한 머리카락 위에 얼굴을 부비며, 그는 작은 목소리로 연신 중얼거린다. ‘ 괜찮아...다 괜찮아 질 거야..........’라고. 기혁은 창가에 기대어 그런 둘을 한참 바라보았다. 구급차가 도착할 때까지 - 17. "왜 항상 여자와 아이들일까..." 유신의 중얼거림에 기혁이 고개 들었다. 여자는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응 급실의 문이 닫히는 것을 보며, 녀석은 천정으로 목을 젖힌다. 가볍게 피가 흐르는 목 위로 솜덩이를 얹으며, 기혁은 살짝 마른 입술을 축인다. 아까 정말 긴장했었다. "아이와 여자들이 가장 약하니깐..." "미경이 선배처럼 강한 사람도 있잖아..." 둘 다 좀 정신이 없었다. 율곡이 손을 씻으러 병원 화장실을 갔다가 부리나 케 달려나온다. 찬 물을 섞어 커피를 마시며 세 사람은 다소 멍하니 병원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모든 여자와 아이들이 약하다는 게 아냐. 사회적인 의미지. 권력과 힘- 그게 남자들보다 약하다구.. 남성성보다 억눌려 있다구.. 동물적인 근성이나 잔인함만 가진 남성적인 본능에 희생당하기 쉽지..." "그럼..." 기혁의 설명에 유신이 얼굴을 묻으며 괴로운 듯 중얼거렸다. "그럼..누가 그 희생당한 사람들을 보상해주지?" "................" 기자라고 전체는 아니다. 기자들이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어딘가 마음 가득히 남는 착잡함- 그것 때문에 속이 쓰리다. 율곡은 머리 를 쓸어 올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녀석도 어딘가 쓴 물을 마신 듯, 괴로운 얼굴이었다. "누군가가 진실을 말하면 되겠죠.." "............"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때 돌아보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을 바라보고.. 누구도 모르는 것을 알려내고..." "..........."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의견을 물을 수는 있겠죠..." 유신이 다 마신 커피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가볍게 던져 넣으며 고개 끄덕였 다. "그래.............." 응급실에 불이 켜진다. 세 사람은 착찹한 표정으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부산한 병원 복도에서 서성거린다. 그 때 율곡이 마침 생각 난 듯 물었다. "참,..유신이 선배." "...........?" "아까, 인형들은 왜 도대체 꺼내놓은 거에요? 그것도 박스에 잘 담아서...?.." "..........나?" 그러나 유신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스스로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이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내가 그런 거 아닌데? 인형들이......박스에 담겨 있어?" "..네." ".....나..........아냐." 갑자기 모두가 오싹해지는 기분이다. 짙은 소독약 냄새와 함께 모두가 말은 꺼내지 않고 눈치만 보았다. 유신이 조금 이상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 다. "...아마..." ".........." "..인형들이 걸어갔겠지. 제물이 되기 싫어서.. 것도 아니라면........." "..아니라면?" 유신은 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덧붙였다. 피곤한 기색이었다. "인형들이 걸어간 게 아니라면.. 그 꼬마가 정리했겠지..." ".........?" "....있잖아..그거.. ...아기들에게 말해주는 거.. 어지른 장난감 제대로..치우기......." 율곡 역시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바닥을 내려다본다. 난감함과 고통, 그 리고 서러움과 억울함 - 그런 것들이 뭉쳐져 있었다. "따뜻한 기사를 적고 싶다..이제." 자신의 팔을 발 위로 늘어뜨려 그곳에 얼굴을 묻으며, 목에 반창고를 붙인 유신이 대답한다. 나, 지금 울고 싶어- 라고... 18. (완결) 헝클어진 머리, 쭈삣한 수염자국, 창백한 얼굴, 풀풀 풍기는 술냄새, 단정 치 못한 차림, 또한 핏발선 눈동자. 미경이 모두를 골똘히 쳐다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술에 쩔어 있고, 셋 다 밤을 새며 논 게 분명하다. 그녀는 깍지를 낀 손으로 기혁과 유신, 그리고 율곡을 차례대로 쳐다본다. 마치 품평회를 하는 것처럼 한동안 바라보다가, 느긋하게 입을 열어 중얼거 렸다. “그러니깐.................” “....................” “그제 밤에, 회의실이랑 주차장이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게 누군가 다른 사람의 소행이다, 이거지?” “....그렇다니깐요.”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흐흥’이라고만 웃었다. 그리고 다 시 입을 열어 비꼬듯 미소짓는다. “그러니깐.......... 그렇게 사무실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도.. 셋 다 동시에 사라져서.. 이틀만에... 그것도, 이번에는........ 단체로 어제 술을 퍼 마시고, M고등학교 학생들과 아침 댓바람에 취중 농구 시합을 한 것도... 그냥 재미로 한 거다...이거지?“ “...............아, 그렇다니깐요!” 미경은 범인을 찾는 탐정처럼 쓱- 기혁을 노려보았다. 율곡은 처음부터 웃 고만 있을 뿐 아무 말도 안 했고, 유신은 시치미를 딱 떼고 있으니, 평상시 에 성격적인 측면에서 가장 냉정한 기혁을 캐려는 것이다. “자기, 인생 포기했어?” 기혁은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깜박였다. 미경은 담배를 피며 그의 앞을 왔 다갔다 거린다. “그렇잖아...자기.. 이유신과 같이 논다는 건, 인생 포기했다는 말이야. 자긴 원래 이런 사람 아니잖아?“ 기혁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잠시 당황했다. 아, 그게........아이의 엄마를 문병 갔다가, 셋 다 어떤 짓을 했는지 말해 줄 수도 없었다. 사실은 어제 근 이틀만에 입원한 아이 엄마를 문병 한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간 간히 우울한 그녀의 기분을 풀어줄 겸, 셋은 정신병원에서 간단한 공연을 했었다. 일명, 코스프레- 라고 하기에는 이미 나이를 너무 먹은 그들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재미있는 공연을 끝내고 왔다. 새 밀대 걸레를 머리에 얹고 이상 한 썬그라스를 끼고, 엉거주춤 춤을 춰가며 노래했다. 그녀가 손뼉을 치며, 웃다가 눈물이 고일 때까지. 병원 관계자들이 달려와서 그들과 환자를 거 꾸로 인식할 때까지-! 원래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는데, 유신이 바락 바락 우기는 바람에, 그 점잖은 율곡과 자신까지 이렇게 되어 버렸다. 이제는 어쩔 수 없지만 말이 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자신조차도 그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다. “좋아!” 하룻밤을 꼬박 세워 노는 바람에 정신없이 가물거리자, 미경이 크게 손뼉을 친다. “다 봐주지. 국장님께 입도 뻥긋하지 않겠어. 내일이면 어차피 돌아오실텐데, 뭐.. 자기들 기사 모아 놓은 거 보면 아시겠지...“ “.........누나!!” 유신이 억울한 듯 외쳤다. 평상시에는 거의 하지 않는 외침- 누나. 조미경을 누나라고 부르느니 성을 갈겠다던 유신도 이 때만큼은 비굴해진다 . 그럴 수밖에 없다. 벌써 일주일이 지났건만, 다음 기사를 준비할 아무런 내용도 없는 그들이다. 미경이 알아서 기사꺼리를 들을 알려주면 좋겠는데, 이건 한마디로 협박이다. 레포트 안 빌려줄테니, 니들이 알아서 쓰라- 라 는 식의. “누나, 제발!!!!!!” “나 너같은 동생 둔 적 없어.” “..아우이이잉~ 미경이 누나~~~” 유신의 거듭되는 오바에 미경이 기가 막힌 듯 코웃음을 친다. “웃기시고 있네, 다들. 얼른 올라가서 씻고 잠이나 자!!!!!!!!!!!!!!!!“ 율곡과 기혁은 키득거리며 유신을 떼어놓고 윗층으로 올라간다. 잘해봐라, 이유신. 너 밖엔 믿을만한 놈이 없다. 그래도 조미경이 가장 예뻐하는 이유 신이니 잘 해낼 거라고 믿는다. 샤워를 말끔하게 끝내고, 기혁은 어지러운 숙소를 정리했다. 대충 치우고 잘 생각이었다. 사실 일주일간 정말 힘들었다. 그나마 부장이 자리를 비운 탓에 그렇게 매달린 것이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말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다. 다들 말은 안 하지만, 율곡이나 유신도 언뜻 그런 생각인 것 같다. 이제 한숨 자볼까- 라고 생각하며 기혁은 침대보를 넓게 핀다. 유신이 가져 온 곰 인형이 침대에 떡- 하니 누워 있었다. 별 웃기는 놈을 다 보네- 라고 생각하며 그는 그것을 구석에 휙 내팽겨쳤다. 바로 그 때쯤, 마찬가지로 개끗이 씻은 듯한 유신이 갑자기 기혁의 방으로 성큼 들어선다. 그것도 늘 듣는 이상한 노래를 부르면서- “키스해~ 주세요~ 입술이 부르트도록~“ 아까 미경이 저 아래에서 짓던 기막힌 표정을 기혁도 지으며 녀석을 노려본 다. 녀석은 마치 ‘아비정전’에 나오는 장국영처럼 맘보춤을 추며 들어섰 다. 그렇다고 장국영처럼 잘 추지도 못한다. 오히려 몹시 웃겨보였다. 더군 다나 머리 위에는 수건을 터번처럼 두르고, 미끈하고 잘 빠진 상체를 드러 낸 채, 사각 팬티만 입고-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며! “키스해~ 주세요~ 입술이 부르트도록~ 꼭 안아주세요~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 도대체 저 노래의 출처가 뭘까- 라고 생각도 하지 않고 기혁은 그냥 침대로 들어갔다. 깨끗한 면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 녀석이 사라지기만 을 기다린다. 그러나 이유신은 한참 엇박자로 박수치고 노래하며 춤추다가 불쑥- 자신의 침대 위로 뛰어 올랐다. “야, 너는 니 방 가서 자!!!!!!!!” 이젠 불면증도 없잖아!- 라고 기혁은 침대를 파고드는 유신을 향해 소리질 렀다. 그러나 이 철면피 깨끗한 총각은 혀를 내두르며 곰인형을 주섬 주섬 챙길 뿐이다. “내 인형, 내 인형, 내 인형...........” 진짜 웃기는 놈이다. 만날 외계인만 그리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 아픈 구석 도 많고........그러나 유신은 동정심을 발휘하기에는 여간 미친 놈이 아니 다. 녀석은 척- 하고 기혁에게 달라붙어 발을 부비적거리며 행복한 듯 홍홍 거렸다. 미친 새끼.. “이 곰인형 이름이 뭔지 알아요? 한 기혁이에요.” 그러더니 인형을 쳐들어 쪽쪽- 하고 입을 맞췄다. 오슬 오슬- 소름이 돋는 다. 너는 인생 자체가 엽기다, 이유신!!! 기가 막혀서 노려보자, 녀석은 팔꿈치 한 쪽으로 기혁을 내려다보듯 옆을 향해 눕는다. 그런 녀석이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론 귀엽다. 여러모로 웃기고 특이한 녀석이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기혁은 그의 장난스런 눈동자를 쏘아보며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유신은 철 딱서니 없이 곰인형에 계속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 인형을 확 빼앗아서 집 어 던지자, 냉큼 주워온다. 이거, 덩치만 크고 복실한 큰 개나 다름없다. “뭐가 궁금한데요?” “...그 .. ...귀신들 말야..“ “..오호~ 귀신~!!” 장난치는 녀석의 단아한 이마를 손바닥으로 확치자, 집중하겠다는 듯 고개 를 끄덕였다. “제발 장난 좀 치지 말고 들어. 그 .........귀신들............“ “...듣고 있어요.” “....그 귀신들은 언제 떠나? 항상 눈에 보여?“ 그러자 녀석이 빙긋- 웃는다. 여전히 팔로 머리를 지탱한 채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다. 목에는 길게 칼 자국이 조금 남아 있다. 깊지 않았기 때문에 재 빨리 치료했지만, 그 때 사실은 적잖이 놀랬다. 이 녀석이 들으면 기뻐 날 뛰까봐 말은 안 했지만, 정말 심장이 덜컹거릴 정도로 걱정했다. “항상 보이진 않아요. 낮이나 밤이나 가끔 보이지만... 아주 가끔만 보여요. 늘 그렇진 않아요.“ “.....................”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기혁이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묻고 싶은 게 더 많았지만, 일단은 잠이 너무 쏟아졌다. 한숨 자고 일어나서 어서 일해야 겠다. 덕분에 기사꺼리를 하나도 준비 못한 것이다. 부장이 돌아오자마자 회의를 하자고 할 건데... “선배...........” 이왕 옆에 누운 유신이 귀찮았지만 포기하고 잠이 들 무렵에 녀석이 갑자기 흔들어 깨운다. 이런 괘씸한 녀석을 봤나... “나도 궁금한 거 있어요.” 그리고는 말똥말똥 자신을 내려다본다. 기혁은 그 잘생긴 얼굴을 밀어내려 다가 이내 포기한 듯 눈썹을 한 쪽만 밀어 올렸다. 그래, 뭐가 궁금하디, 이 외계인아!! “시아랑 키스 했어요?” “.............???” 녀석의 눈동자가 번뜩이고 있다. 그 따위가 왜 궁금한 건지 모르겠지만, 집 채만한 털복숭이 개가 자신을 올라타고 꼬리 흔드는 기분이다. ‘사탕주세 요-’ 라는 식으로.. “키스 했냐니깐요??” ‘사탕주세요-’ “아, 왜 대답을 못해요? 했어요? 안 했어요?“ ‘사탕주세요-’ “...우웅...했는가보다.........” 녀석은 젖은 머리를 흔들며 ‘사탕주세요’를 멈춘다. 그리고는 자못 심각 하게 실망한 표정으로 풀썩- 베개 위로 머리를 던졌다. 휙 돌아눕더니 혼자 뭐라고 궁시렁거리며 새우처럼 몸을 둥글게 만다. 기혁은 도대체 왜 녀석이 그런 걸 궁금해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한편 으로는, 이 녀석이 게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둘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었던 불장난 하룻밤을 기억하고 싶진 않다. 녀석도 5년간이 사귀었던 사람이 있다고 들었고, 뭐 헤어졌다고는 하지만 그 감정이 쉽게 살아졌을리도 없다. 그러니 자신을 딱히 좋아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아-!..........” 이상한 녀석이네- 라고 생각하며 눈을 감던 기혁이 그러나 그 순간, 짧은 감탄사를 내며 반짝 눈꺼풀을 연다. 그러고 보니 알겠다. 이 녀석 그냥 사 랑받고 싶어 애교부리는 큰 강아지 일지도 모른다. 그 인형 사건으로 알게 된 이 녀석의 과거. 그것이 비록 아주 약간의 과거이지만, 이 장난끼 가득 하고 조금은 이상해 보이는 녀석이...사실은 속이 깊고 안타깝다는 걸 잘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 녀석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사람의 손을 타는 녀석- 사람이 그립고, 사랑이 그리운 녀석일지도 모른다. 불쌍한 것. “야...이유신.” 녀석은 계속 자신에게 등을 보인 채, 몸을 둥글게 말고 인형만 꽉 끌어안고 있다. 뭐라고 끊임없이 궁시렁거리면서- “야, 이유신. 잠깐만 이 쪽으로 돌아누워봐.” “싫어요, 시아랑 키스했잖아. 분명 그보다 더 한 것도 했을 거야. 어쩐지 나한테 소개시켜 달라고 그렇게 목을 매더라...“ 누가 목 매냐?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 걸, 지가 소개 해 놓고는.. “야, 이유신, 사탕줄게.” “내가 애유? 사탕준다면 돌아보게....“ 궁시렁 궁시렁 궁시렁. 아, 시끄러워죽겠다. 자려면 곱게 지 방가서 잘 것이지, 남의 방에 와서 별 쓸데없는 질문이나 던지고 계속 삐져서 혼자 궁시렁거리고. “시끄러워, 새꺄. 돌아누워봐.“ 녀석은 끝까지 궁시렁거리며 돌아누웠다. 뭐라고 하는 거지, 도대체? “나랑펠라까지해놓고도아닌척시치미뗄때는언제고,시아랑은만나서지들끼리 이짓도하고저짓도하고,나는발도못부비적거리게하면서지들은이짓도 하고저짓 도하고...........” 궁시렁궁시렁궁시렁궁시렁궁시렁...... “닥쳐라, 제발...” “나도스물여덟이나먹었는데,맨날애처럼취급하고무슨사고만쳤다하면내 곰인 형구박이나하고,여긴다썩었어.무조건내탓이래내탓..” 기혁은 그의 궁시렁거림을 조금 알아들었다. 웃겨죽을 것 같다. 정말 잘 웃 지 않는 자신인데, 이 녀석 갈수록 가관이다. 불쌍한 것.....어릴 때 엄마 가 보고 싶었을 뿐인데, 귀신을 보게 되었다는 말이 너무나 마음 아팠다. 그리고 녀석의 그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서 언제부턴가 농담과 거짓말 만 해왔다는 말도 너무 마음 아팠다. 자신은 노말이지만, 그래도 이 녀석을 그 때 뺨 때린 것도 조금 후회한다. 녀석의 말처럼 사랑한다고 단 한마디 만 하기도 충분치 못한 시간인데, 늘 감정적으로 곤두서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오늘같이 정말 넉다운 되도록 시달린 마지막 날은 보상정도도 괜찮 을 것 같다. 특히나 저 투덜거리는 입을 막는데는 더욱- “내가노래얼마나잘하는데아무도안들어주고사탕은또뭐야그렇게고생했는데좀 봐주면어디덧나나누가펠라한거기억이나하래좀잘해주면어디덧나사탕이나먹고 떨어져라고말하고......” 닥쳐 이 궁시렁귀신아. 너 지금 랩하냐? “사탕같은거주면누가기분이풀린다나,내가여섯난꼬마도아니고한기혁길가다 가넘어져라씨바그렇게즐겁게해주는데한번도웃는것도안보여주....” 키스했다. 자신을 쳐다보지 않고 중얼거리는 게 너무 웃겨서, 기혁은 웃음까지 띄며 살짝 녀석의 끝없는 궁시렁에 입을 맞춘다. 눈을 감고 있던 녀석이 반짝 시 선을 뜬다. 가물거리는 눈동자가 살며시 얽혔다. 부드럽게 입을 맞추자 겨 우 조용해졌다. “..............-!!!!!!!” 그냥 살며시 녀석의 기분에 호응해서 입 맞춰 준 것인데, 이 녀석은 뒷머리 까지 끌어당기며 혀를 밀어 넣었다. 이런 괘씸한 것!!! “.............아............” 그러나 고집을 부리던 입술이 닫힌 채 퍼덕이다가 조금 열렸다. 일단은 자 신이 덮치듯 누른 자세 때문에 기혁은 손해였다. 자세가 안정되지 않으면 힘 싸움에서 밀리는 법이다. “.............-!!!!!!!!!” 얽히는 혀 마디, 그리고 부드럽게 섞이는 타액과 뜨겁게 죄여오는 숨결. 가 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머리 속으로 이전한 심장이 쿵쿵- 관자놀이를 두들겼다. 이상하게 기분 좋아지고 나른한 키스다. 그렇게 아등바등거리며 녀석과의 관계를 부정했는데, 순간 아찔할만큼 괜찮은 기분이었다. 몽글 몽글, 감촉좋은 입술이 잡아먹듯 덮쳐온다. 순간 허벅지 사이를 지피 는 뜨거운 기운에, 기혁은 녀석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격렬하게 혀를 움직 였다. 사내녀석들끼리의 키스- 그러나 숨이 막힐만큼 좋았다. 가늘게 헐떡 이는 숨결조차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조금만 더..............” ‘사탕주세요‘ 보다 더 갈라지고 유혹적인 목소리로 녀석이 속삭였다. 닿 을 듯 말 듯 입술을 떼며 녀석이 말한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위험한 기분 이었다. 추락할 듯 말 듯 낭떠러지에 서 있는 그 번지점프의 짜릿함- 그것 과 닮아 있다. 갈증나 미친 것 같은 시선으로 눈을 살짝 내려깔며 녀석이 입술을 닿으려 애썼다. 그러나 기혁은 살짝 그 순간에 뒤로 몸을 뺀다. 누워 있던 녀석이 점점 더 머리를 일으키며 안간힘을 썼다. 조르듯 다가오 는 뜨거운 열기와, 망설임의 이중고에 시달리며 자신은 얼굴을 후퇴시켰다. 몇 번이나 서로 실랑이를 벌이듯, 입술이 스치고 그것을 피하기를 반복한 다. 마침내 포기한 듯, 유신이 살짝 키득거리며 그대로 자신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마치 그것으로 대신하려는 것처럼, 꽉 누른 뜨거운 열기가 도장처 럼 흔적을 남긴다. “....나..............” 아직도 자신은 유신을 타고 눌렀다. 몸 아래로 뜨거운 체온이 느껴진다. 갑 자기 일순 든 차가운 이성에 기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잠 이나 자야지, 이게 무슨 짓인가- 이건 사탕의 백배나 되는 행위다. 물엿같 이 끈적 끈적한 욕구- “....내 방 가서 잘래요.” 녀석은 이 어색한 상황을 무마하려는 듯, 부지런히 곰인형을 챙기며 일어섰 다. 오히려 다행이다 싶어서, 기혁은 붉어지는 목덜미를 숨기며 재빨리 침 대 안에 파고든다. “아니면, 선배 때문에 불면증 걸릴 것 같아..” 아아, 그 마지막 말 때문에 거의 숨이 넘어갈 듯, 기혁은 녀석에게 베개를 던졌다. 좀, 이런 상황에서는 모르는 척 하고 넘어가라, 이 새꺄!!!!!!! “.........변퉤 삼십대!!!” 녀석이 분하다는 표정으로 빽 소리를 지르더니 만족스럽게 웃으며 방을 나 갔다. 기혁은 기가 막힌 까닭에 천정을 바라보며 다시 잠을 청한다. 누가 이유신 좀 안 잡아가나, 제길!!! <에피소드 2-마지막 인형 end> <에피소드 2 - 번외 : 하늘에게 묻다> 0. 유신의 아버지와 만나기로 한 마지막 날이다. 기혁은 거울을 쳐다보며 잠시 한숨을 쉬었다. 그의 아버지가 대형 신문사 사주이다보니 함부로 대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그리고 자신처럼 현실과 잘 타협하는 인간은 뭐니 뭐니 해도 그의 제안이 당긴다. 즉, 아들 이유신을 GAS에서 나오게 만들어 달라는 것. 방법만 잘 쓰면 가능 할 것도 같지만, 최근의 일들이 문제다. 바로 몇 달 전에 그런 제안을 들었 다면 좋다고 만났겠지만, 지금은 좀 위태롭다. 무엇보다 이유신이라는 인간 이 좀 달라보인다는 점이다. “어디 가요?” 율곡이 팩스기 앞에 붙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키가 크고 호남형인 율 곡은 사람의 마음을 풀어주는 재능이 있다. “아, 나.. 잠시 외근 좀 갔다 올게.“ 차마 취재 간다고는 뻥 못치겠다. 율곡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린다. “가기 전에 그럼 유신이 선배 좀 태워다 줘요. 아까부터 차 키 달라고 궁시렁 거리는데.. 그 사람 도저히 운전 못 맡기겠어.“ “...그래.” 이해한다. 고속도로에서 급하면 반대차선으로 달릴 녀석이 바로 이유신이다. 1. 이상하게 녀석이 조용하다. 기혁은 차를 운전하며 녀석 쪽을 잠깐 바라보았다. 유신이 오랜만에 침묵에 휩싸여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게 긴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일 있어?” 좀 걱정스러워서 살짝 묻자, 녀석이 해맑은 갈색 눈동자로 쳐다보며 씨익 웃는다. “아뇨.” “그럼 누굴 만나러 가는데 그렇게 긴장해?” 또 다시 대답이 없다. 이상한 일이다. 기혁은 남산까지 가 달라는 말도 좀 이상하게 생각하며 핸들을 돌렸다. 남산과 유신의 아버지 회사는 별로 멀지 않다. 자신은 어차피 광화문까지 가는 길이니, 돌아올 때 녀석을 다시 태 워오면 그만이다. “볼 일 마치며 문자 넣어. 근처에 있을테니깐..” “.....저기요, 선배.” “저기에는 선배 없어.” 피식- 간만의 농담에 유신이 웃었다. 웃으니 한결 철딱서니 없는 그 순수한 미소가 된다. “선배, 좇나 썰렁해요.” “...알아, 새꺄...” “나 없는데서는 절대 농담하지 말아요..” 웃기고 있네. “할 말이 뭐야?” 보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묻는데도, 녀석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젓는다. 그 러더니 다시 창 밖을 바라보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처음 보는 버릇이다. 그 다지 화가 났거나 초조한 것 같지는 않은데, 뭔가 깊이 생각하는 모습이었 다. “누구길래, 이 추운 날 밖에서 만나냐?” 바야흐로 겨울이다. 얼마 전까지는 초겨울이었는데, 이제 겨울이라는 이름 에 걸맞게 조금씩 추워진다. 두툼한 외투를 입고 있었지만, 그래도 추웠다. 히터를 적당히 조절하며, 기혁은 유신의 단정한 옆모습에 의아해진다. 말 끔하고 귀티나게 생긴 얼굴이 보이지 않게 작은 한숨을 쉬고 있었다. 생각 할수록 미스테리한 반응이다. “사탕주면 말해줄게요...” 그래놓고는 꺼낸다는 말이 고작 그거다. 기혁은 조소를 내뿜었다. 그 날은 그냥 그래서 한 거라구, 시끼. 하도 안쓰럽고 기특해서. “아니에요, 나중에 데리러 와서 만나요.” 녀석은 남산 앞에 도착하자 작게 웃으며 안전밸트를 푼다. 기혁은 그래도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에 녀석을 불러 세웠다. “이유신.” “................?” 창문을 내리자, 녀석이 차가운 기운과 함께 차안으로 불쑥 고개를 집어넣었 다.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무슨 말?” 아까까지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보였는데, 녀석은 오히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웃고 있다. 그 모양이 얄미워서 기혁은 유리창을 올려버렸다. “아우..아프다구요, 선배!” 급하게 빼내려던 목이 유리창에 걸리자, 녀석이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거린 다. 기혁은 씩 웃으며 녀석이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커다란 외투 안에 손을 밀어넣고 유유자적 걷는 녀석. 그 뒷모습이 이상하게 외로워보이는 건 아마 자신의 착각인가 싶었다. “............-!!!!!!!!!!” U 턴으로 핸들을 돌리며 나가려던 기혁은 차꽁무니가 미쳐 빠지기도 전에 잠시 백밀러를 들여다본다. 작게 멀어진 유신이 길가에 서 있는 누군가와 만나고 있었다. 기혁은 입술을 씹으며 한참 바라보다가 마침내 결심했다는 듯 기어를 당겼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유신이 어딘가 이상해서 안 될 것 같다. 저번의 인형 사건도 있고- 기혁은 어서 주차할 곳을 찾아 녀석의 뒤를 밟 을 생각이었다. 물론, 약간의 거리감과 함께. 안전하다는 것만 알면 차를 몰고 떠날 계획이다. 2. 유신과 그 남자- 누군지 모를 동행인이 멈춰 선 것은, 서울 근교가 내려다 보이는 산 중턱이었다. 기혁은 스스로의 노파심을 저주하며 추운 발을 동동 구른다. 그나마 산을 탔기 때문에 조금은 몸이 훈훈해졌다. 주변에서 나무 향이 계속 흐른다. 아무 것도 거침없어 보이는 조용한 산중 에 이따금 차들이 지나갔고, 유신과 그 남자는 자신이 있는지 모르는 게 분 명했다. 조금 옆에 떨어진 벤치에 앉아 있었지만, 나무들과 숲이 우거져 적 당히 모양을 감춰준다. 이것이 침엽수림이었기에 망정이지 겨울 되어 잎 다 떨어진 활엽수림이면 큰 일 날 뻔했다. 기혁은 앞의 몇 마디만 듣고,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취재 정보원일 수도 있다. 유신도 연예부 기자이니, 가끔 비밀리에 정보원들을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그가 만난 남자는 연예계 계통은 아닌 것 같았다. 더군다나 둘 다 지나치게 조용했다. 유신의 머리카락은 간간히 겨울 바람에 나부꼈고, 남자는 잘생겼지만 적어도 유신보다 몇 살은 많아보였다. 서른 살 초반? 아마도 기혁은 자신보다 서너 살 많은 나이라고 직감했다. “.......선생님, 있죠...........” 그 때 유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얀 입김과 함께 튀어나온 한마디에, 기 혁은 낭패했다. 선생님이라고 했다. 그러니 고등학교 은사님이거나 뭐 그럴 것이다. 어서 자리를 피해야겠다. “선생님이 나에게 기자가 되라고 하셨잖아요....” 그 때 유신의 뭔가 씁쓸한 한 마디가 자신의 발목을 잡는다. 기혁은 살짝 나무 틈으로 녀석을 엿보았다. 남자는 유신의 말에 쓰게 웃는다. “그랬지.” 유신이 눈을 들어 맑고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 녀석의 단정한 미간을 스쳐갔다. 그는 선생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하늘을 보고 있었다. 상대방도 유신을 돌아보지 않았다. 둘 다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미묘하게 가슴이 아파 보인다. 그것은 경치를 구경하는 것과 다른 의미였다. 둘은 어딘가 필사적으로 서로 쳐다보지 않았다. 이유 신이 저 답지 않은 조용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세상을 돌아보면, 더 이상 선생님을 돌아보지 않을까봐?” “................!!!!!!!!!” 그때 알아차렸다. 저 사람이 바로 이유신과 사귄 유부남이다. 선생님일거라 고는 꿈에도 몰랐다. 기혁은 자신이 괜히 걱정하고 따라온 것에 후회했다. 이런 장면을 보리라고는 예상도 못했다. 그러나 떠날 수 없는 것은, 유신이 짓고 있는 이상한 표정 때문이었다. 녀 석은 줄곧 하늘을 보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하늘을 쳐다보며 식도로 타 고 오는 기운을 삼키려는 노력 같았다. 실제로 그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 었고, 가끔 목울대가 울컥거렸다. 뭔가를 참는 것처럼 녀석은 인상을 찡그 리고 있었는데, 간절할만큼 애를 쓰는 기색이었다. “나를 세상에 맡겨 놓고, 선생님 혼자 이별하려고?” “....................” “그렇게 날 떠나서 행복해요?” “...................” “내가 기자증을 받던 날, 선생님의 청첩장을 받았는데.....” “...................” “그럼 내가 조금이라도 위로받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남자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혼란스러운 듯, 아름다운 얼굴을 찡그 리며 머리만 쓸어 올린다. 나이 들었음에도 서늘하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기혁은 조금 마음이 아팠다. 유신의 아버지는 녀석이 단지 유부남과 사귀고 있다고만 말했다. 이런 이야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무리 보아 도, 유신의 선생님이라는 남자도 유신을 포기하지 못한 것처럼 아파 보인다 . 그 때, 유신이 혼자 중얼거리던 걸 멈췄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쳐다 보았다. 젊고 풋풋한 수컷 냄새가 나는 이유신이다. 겨울 바람을 맞고 서 있는 그는 한없이 당당하고 강인해 보인다. “...............-!!!!!!!!” 그리고 기혁은 절대 움직일 수 없었다. 유신은 울고 있었다. 한 줄기 조용 한 눈물이 녀석의 살짝 찌푸린 얼굴에 흘러 내렸다. 눈동자도 침착하고 눈 물도 침착했다. 그 이상의 눈물도 없이 녀석은 단 한번만 울었다. “나요, 선생님............” “......................” “정말 기자가 되고 싶어요. 남들은 나를 그냥 3류 기자라고 생각하겠지만... 요새는 선생님께 고마워하고 있어요.“ “.....................” “진실을 찾고, 아무도 관심 없어하는 주변을 다루고..... 세상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걸 더 존중해줄 때까 지...“ “.....................” “처음으로 그런 기사들을 쓰고 싶어졌어요. 만약 선생님이 그런 걸 처음부터 내게 원했다면...“ “....................” 미안해요- 라고 유신은 작게 덧붙였다. 기혁은 속이 욱씬거리며 아팠다. 너 무나 미묘하게 울어버린 투명한 눈물이 마음을 들쑤셨다. 겨울 바람과, 숲 가득찬 솔냄새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어디선가 눈방울이 내릴 것처럼 조용 한 겨울 속에서 녀석은 조금 쓰게 웃었다. “미안해요. .....저는 처음부터 잘 하진 못한 것 같아요.“ “.................” “늘 형을 아프게 만들었고.. 굳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라는데도, 나 혼자 형이라고 우겼고...“ “..................” “그렇게 조심하라고 말했는데도 언제나 사람들 많은데서 안고 키스하고... .... 그런 거 무지 싫어했던 거 알아요.“ “................” “내가 그 때 어려서 미안해요..........” 녀석의 눈에서 다시 눈물 한방울이 흘러 내렸다. 깨끗한 얼굴로 사과하고 조용히 운다. 기혁은 왜 자신이 덩달아 아픈지 깨달았다. 저 녀석은 저 남 자를 정말 사랑했던 것이다. “형수님께 안부 전해주세요.” 녀석이 코트 안에 손을 넣으며 조금 웃었다. 해맑은 아이같은 미소다. 남자 가 길게 한숨을 쉬며 주저하듯 앞으로 걸어갔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 겠다는 표정이었다. 혹은 다른 말이 필요 없었거나. 참 길고 모진 겨울이다- 라고 생각하며 기혁 역시 작게 한숨쉬었다. 무언가 가 흉부를 압박하고 있다. 강한 힘, 지구 중심을 끌어당기는 힘, 바로 중력 . “.......그거 알아요?” 녀석이 눈물을 흘리다 웃는 표정으로 물었다. 천진스러운 질문에 남자가 안 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코트에 숨은 녀석의 한 손을 빼어낸다. 같이 두 손을 맞잡았고, 두 사람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드디어 서로를 마주보았다. 녀 석이 미소짓는 시선으로 주변을 조금 둘러본다. “형과 이별하는 날이 가을이었는데.....” “.......유신아..........” “그 날 이후로 난 항상 가을이었어요.” “..........이유신....” “형과 나 사이에는 항상 가을이 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형을 사랑할 때는...........“ “..................” “어떤 계절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별하고 나니 비로소 계절이 보였어요. 아, 다시 가을이 왔구나...라고. 형을 사랑하지 말고, 계절을 좀 더 사랑할 걸.... 그럼 형이 나 때문에 숨 막힐 일 없었을 건데.. 날 떠나지 못했을 건데... 역시 나는 어렸어요.... 항상 힘들게만 하고, 항상 아프게만 하고.....“ 그 때, 남자가 갑자기 유신을 와락 껴안았다. 기혁은 그 제서야 남자도 마 찬가지로 울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처음부터 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것은 그저 목이 메어서였던 것이다. 남자가 유신의 등을 두드리며 작게 말했다. “괜찮아..........이유신...” 녀석이 입술을 꽉 깨문다. 뭔가를 깊게 체념한 듯 눈을 감았는데, 농도 짙 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다음 번엔 좀 더 좋아...질 거야.” 라고 남자가 말했다. 기혁은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가만 히 그들을 지켜보았다. 남자가 유신을 홀로 남겨두고 쓸쓸하게 돌아설 때까 지. 그리고 유신이 돌아보지 않고 그저 하늘만 올려다 볼 때까지. 남자는 조용히 돌아서서 천천히 사라졌다. 유신은 계속 하늘만 쳐다보고 있 었다. 기혁도 유신을 남겨 놓고 그곳에서 발을 옮겼다. 그는 어쩐지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아니, 언젠가 기혁이 느꼈던 그 감정- 태어나서 부터 혼자이고, 죽을 때까지 혼자 남겨진 듯한 그런 기분을 갖게 만들었다. 한참 길을 따라 내려오려니, 조금 앞에 그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누군가 의 사랑을 받고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그러나 그런 사람의 뒷모습도 여느 사람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기혁은 그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은 어떻게 그 긴 시간 동안 사랑해왔습니까- 라고. 그러다가 문득,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자신도 유신처럼 갑자기 하늘을 올 려다본다. 마치, 아까 미처 올려다보지 못한 것처럼 계속해서 남자는 산길 아래 틈에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기혁도 잠시 멈췄다. 그리고 같이 그가 바라보는 곳을 쳐다보았다. 누군가 의 모습이 하늘에 비췬다면, 거울처럼 그것을 들여다보듯- 내가 보지 못하는 동안도 이 하늘에 그가 비취고, 내가 그를 사랑하지 못하 는 동안에도 같은 공간이 그를 지켜주길- 마치 환청처럼 유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가요. 빈 하늘에 안부 묻습니다. 그 날 이후 당신은 항상 내 가을입니다 . 3. 기혁은 한동안 물끄러미 커피 잔만 바라보았다. 유신의 아버지가 초조한 듯, 값비싼 탁자를 두들긴다. 마치 생각의 너머를 집듯, 그는 노려보는 시선이었다. “그래, 제안한 건 생각 좀 해 봤나?” “.................” “이만하면 시간은 충분히 줬다고 생각하네. 자네도 알다시피 난 바쁜 사람이야.“ 기혁은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마셨다. 유신의 아버지는 조금 재촉하듯 언성 을 높인다. “자네도 충분히 이해하지 않나? 머리가 되는 기자라고 알고 있네. 매우 이성적이고 현실적이라고 들었고....“ “.................” “유신이, 그 녀석이 그 사귄다는 유부남 녀석과 제대로 정리하게 해 주고. .. 또 GAS를 나오게 해 준다면 정말 보상을 해 주겠어. 섭섭지 않을 정도로 말야.“ “..................” 낮게 한숨을 쉬며 기혁은 그를 쳐다보았다. 속물적인 것에는 자신있다. 지 금까지 늘 그래왔다. 그리고 막상 유신과 어떤 일들을 겪기 전까지는 역시 자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일들은, 그것을 겪은 것과 동시에 자신을 바꿀 때가 있다. 사랑이 그렇고, 이별도 가끔 그렇다. 때론 사랑을 보는 것도 그 렇고, 이별을 보는 것도 그렇다. “국장님..” “..그래, 말해보게. 계약서라도 쓸까?“ 드디어 입을 열자, 그는 반색을 하며 만년필을 꺼낸다. 비서라도 부를 듯이 기쁜 기색이었다. 그러나 기혁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금 힘겹게 운을 뗀 다. “국장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유신군과 그렇게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닙니다.“ “그래, 그렇다고 들었어.” “직장에서도 늘 싸우고.. 성격도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 녀석이 좀 그래. 누군가에게 맞추어 살지 못하지. 나도 굉장히 많이 싸웠네.“ “네..사실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죠.” 아들이니깐, 이런 말에 기분 나쁘시겠지만 말입니다- 라고 덧붙이자, 국장 은 손을 휘휘 저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이다. 그 러나 기혁은 그것이 오히려 마음에 안 든다. 마치 자신이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상대방에게 무조건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기혁은 조금 정색을 하고 미소지었다. 점점 더 머리 속이 개운해진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국장님..” “..........?” “제가 좋아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 “...자유란... 기꺼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편을 드는 것이다...“ 그가 눈썹을 찌푸린다. 기혁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공들여 입고 온 양복과 넥타이가 거추장스러웠다. “아니, 이봐.........” 그대로 사무실을 걸어 나가려는 태도에, 당황한 국장이 자신을 부른다. 목 소리에도 초조한 기색이 금방 드러났다. “뭔가 더 원하는 게 있는가? 그럼 더 보태주겠네. 이봐, 이건 좋은 기회라구. 누구나 인정하는 대형 신문사의 기자라는 자리란 말야...“ “....아..............” 기혁은 문을 잡다가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로 돌았다. 그리고는 드물게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국장의 시뻘건 얼굴에 가볍게 목례한다. “잊으셨나봅니다..” “............?” “전 이미 기자입니다, 국장님. 이유신 기자도요.“ “.............!!!!!!!!!” “저는 국장님의 개인 인격에는 관심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기자에게는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침해하는 아들의 자유, 그리고 당신 이상의 그 누군가가 침해하는 어떤 자유들...“ “.........이봐!!!!!!!!” “전 이유신의 개인 인격에도 관심 없습니다. 마음에 들지도 않구요. 하지만......... 적어도 그 녀석이 누군가에 의해 부당한 일을 당하면...“ “...........” “언제든지 달려갑니다. 그리고 항상 까발릴 겁니다.“ 쿵- 하고 문이 닫힘과 동시에 안에서 고함 소리가 들린다. 기혁은 문에 기 대 선 채로 살짝 웃었다. 문 밖에 있던 비서가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선 것이다. 그는 넥타이 매듭을 조금 고치며 가볍게 그 곳을 걸어 나왔다. 마침, 주머니 안에서 전화기가 삐삐- 거린다. 지금 막 도착한 문자였다. =눈사람 대기 중. 빨리 좀 와요. 기다린 보상으로 사탕 줄 건가요?= 기혁은 그 문자를 보며 조금 웃었다. 사실 국장에게 꼭 그 이야기를 해 주 고 싶었다. 우리가 함께 있는 동안은, 나에게도 항상 가을입니다.- 라고. 우리는 가끔, 만날 수 있는 사람인데도 하늘을 향해 안부 묻는다. S <에피소드 3 - 그 녀석네 베이커리> 0. 서울의 외곽, 경기도 인근에 위치한 주거 사무 통합 형태의 건물 GAS. . 그 곳은 바로 저널리즘은 없지만, 대중성만은 끝내주게 좋은 잡지사로써, ‘가 쉽과 스캔들(gossip and scandal)'의 약자 GAS로 통하는 회사다. GAS의 42살 된 박기훈 부장은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뭐니 뭐니 해 도 윗 사람의 특권이란 보다 넓고 보다 조용한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것이 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박 부장은 그렇게 생각한다. 자신의 앞에는 청바지 차림의 강율곡 기자가 웃음을 띠며 서 있었다. “그러니깐, 결국에는 내가 회의 시간에 한 이야기가 다 헛것이란 말이야? ” 그는 허탈한 심정이었다. GAS에는 정식 기자가 많은 것도 아니다. 대부분은 계약 기자들이고, 등록된 기자는 자신을 포함하여 5명이 전부다. 문화부의 강율곡은 올해 26살로 잡학다식한 편이며, 바로 자신이 채용했다. 대학은 나오지 않았지만, 폭 넓은 상식과 사람에 대한 인내심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높게 평가되었다. 율곡은 처음 GAS가 생길 때부터 자신과 함께 했다. 그러 니 올해로 입사 4년차이다. 연예부 담당 이유신이 그 다음으로 채용되었다. 율곡과는 불과 몇 개월 차 이로 기자가 된 유신은 물리를 전공했고, 좀 특이한 성격이지만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문제가 있다면 장난치는 것을 너무나 좋아한다는 것일 뿐. 유일한 여자기자인 조미경은 서른 살로, 경력자로 뽑았다. GAS내에서 보기 드물게 균형감이 있다. 머리는 차갑지만 마음은 따뜻하다. 그녀는 정치외교 학을 전공했고, 정치부 기자였다. 어디 그뿐인가- 그녀는 웬만한 술자리에 서 말술로 퍼 마시고, 정치급 거물에게도 기죽지 않는 당찬 성격이었다. 마지막으로 합류한 한기혁은 이제 입사한지 8개월 쯤 지났다. 사실 기혁은 박부장 자신의 아는 인줄로 들어온 케이스다. 기자라고 별로 생각하진 않았 지만, 의외로 잘 적응하고 있다. 특히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지는 판단력과 믿음을 줄만큼 이성적이다. 그의 예리한 펜 끝이 점점 마음에 든다. 외부에서는 이런 GAS를 반 장난 식으로 ‘독수리 오형제’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웬 걸! 밖에서 보면 그나마 괜찮은 외모와 수려한 용모를 자랑하는 그들이다. 합체가 되면 별 볼일 없어서 그렇지, 따로 놀 때는 멋있는 사람 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합쳐졌을 때였다. 이들은 부장의 명령을 무 슨 개집 앞의 고양이 정도로 취급한다. 절대로 귀담아 듣지도, 아니 그럴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깐, 강율곡- 굳이 다들 부산으로 내려가겠다..이거지?“ “...네.” 바로 이런 식이다. 오늘 오전 미팅에서 그렇게 출장은 안 된다고 멋있게 말 했건만, 이들은 상급자의 카리스마를 이로 씹고 침으로 뱉는다. 강율곡이야 원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니 그렇다 치고, 조미경은 일단 눈빛 자체가 반항적이었으며, 한기혁은 열심히 듣는 척 하지만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만 한다. 이유신..- 뭐, 이 녀석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오늘은 아예 대 놓고 회의시간에 외계인을 그렸다. 보통 때는 숨기고 그리더니... “좋아. 그러니깐 12월 특집으로 부산에 내려가서 다들 취재를 해 오겠다, 이거지? “ “네.” “도대체 왜 12월 특집 기사를 부산까지 내려가서 찾는다는 거지?” 박기훈은 한참 고민했다. 아무래도 이건 ‘터’가 안 좋은 탓이다. 이 유능 한 기자들이 자신의 말을 항상 씹으면서, 그래도 때 되면 괜찮은 가쉽과 스 캔들을 쏟아내는 이유 - 그것은 바로 이 건물의 ‘터’가 안 좋은 탓이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말란다. 안 그래도 이혼하고 혼자 살아서 머리가 아 파 죽겠는데, 이 망할 놈의 젊은 놈이 앞에서 빙긋이 웃고 있는 것도 꼴보 기 싫다. “부장님이 출장가신 사이에...” “....?” “미경이 선배가 우리 회사 사이트에다가 공지를 걸었거든요. 12월 특집 기사로 쓸 괜찮은 기사꺼리를 달라구요.“ 이 또한 금시초문이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늘 자신은 이 GAS에서 왕 따인 것이다! 기훈은 아무 대답없이 연필을 씹으며 노려보았다. 그러나 율곡은 침착한 눈 빛으로 웃으며 덧붙인다. “아무래도 연말이 되면 부장님이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으실 것 같아서요. ” 오냐, 고양이 쥐 생각 해준다. “그랬더니, 사이트에 재미있는 기사가 올랐어요. 누군가가 자신이 사는 동네 빵집에 재미있는 일이 생겼는데, 신기한 일이니 꼭 취재 와 달라구요.“ “..........그래서?” 그래, 그렇다 치자. 기훈은 율곡이 마치 이 일을 벌린 미경이라도 되는 듯 심하게 으르렁 거렸 다. 따지고 보면 이 녀석이 가장 나쁘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소심한 중 년은 삐진단 말이다. 감히 자신도 모르게 버젓이 일을 벌리다니!! “그래서라뇨? 당연히 취재 가겠다구요.” “...................” 사람이 가장 상처 입을 때는 바로 이럴 때이다. 바로 내가 왜 화를 내는지 조차, 아니 화가 났는지조차 상대방이 모를 때! 또한 자신이 가장 소심하고 비참해질 때는 이럴 때이다. 다혈질의 박부장이 지만 사람을 앞에 두고 화를 내는 게 전혀 익숙하지 않다. 그는 포기한 듯 창 밖을 내다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역시 터가 안 좋은 거야...” 그렇다. 사람이 자고로 누구를 탓할 수 없을 땐, 주변 환경을 탓하는 게 차 라리 낫다. 특히 마음은 소심하고, 성질만 불같은 자신은 더욱 그렇다. 1. 기혁이 운전을 하며 자신을 힐끔 쳐다본다. 유신은 여전히 그의 옆자리에 떡- 하니 버티고 앉아서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래서...부장님은 결국 기차 타고 내려오신대?” 담배를 피며 미경이 중얼거린다. 그렇게 따라오지 말라고 했건만 굳이 따라 오는 박부장은 변태인지도 모른다. 유신은 속으로 생각하며 혼자 키득거렸 다. 아니면 자신이 생각하듯, 율곡에게 관심 있는지도 모른다. 부장은 늘 중요한 일엔 율곡을 불러서 경과 보고를 받고, 율곡과 상의를 한다. 그러나 율곡이 자신보다 멋질 리가 없다. 다만 박부장이 율곡을 치정의 대상으로 꼬득였기 때문이다. 유신은 정말 그렇게 믿고 있다. 강율곡, 이 멋진 시끼- ! - 분명 박부장을 후린 게 분명하다! “혼자 왜 그렇게 즐거워 하냐, 이유신?” 기혁이 톨게이트에서 몸을 내밀며 자신에게 중얼거린다. 이건 오로지 자신 만의 생각이지만, 기혁은 정말 러브리 하다. 그렇다. 이것 역시 오직 자신 만의 판단이다. 그렇지만 기혁의 저 칠흑같은 눈동자와 야사시한 눈초리-!!! 저것을 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거라 굳게 믿는다. 어디 그것뿐인가- 딱 보기 좋은 몸에 보기 좋게 늘씬한 키, 왠지 싸늘한 입매와 잘 뻗은 콧날, 그리고 길고 보기 좋은 손가락, 결 좋은 피부 -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게다가 한기혁은 차가운 얼음처럼 부서질 줄 모른다. 견고한 그의 차가움은 서늘하게 아름답다. 이유신은 그런 기혁을 떠올릴 때마다 흐뭇해진다. 도 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사내다. 어딘가 무너지거나 조금 흔들릴 때 그가 짓 는 어떤 것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더군다나 나이에 알맞은 그의 어른스 러운 시각이 좋다. 항상 ‘알아서 모셔라’ 식의 시선으로 남을 아래로 쳐 다보는 그 시선-!!! - 예, 알아서 모시지요. “왜 그렇게 웃고 있냐고, 이유신!” 미경이 참다못해 뒤통수를 쳤다. 밤 새 뭔가에 피곤이라도 한 건지, 서울을 빠져나오자마자 율곡은 잠들었다. “앗!! .....아프잖아요...” “아프라고 때린 거야, 이 시꺄. 너 변태냐? 아니면 어제 밤에 너 혼자 거나하게 자위했냐? 혼자만 뭐 재미있는 일 있었어?“ “누나는 무슨 말을 항상 그렇게 해요? 그럴 리가 있어요? 원래 제가 한 멋짐 하고, 한 외모 하고, 한 인물 하잖아요? 인생 자체가 즐겁고 럭셔리 한 이벤트들의 연속인 게 당연하잖아요?“ 조미경이 다시 뒷자석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내가 미쳐-’라고. 기 혁이 조금 얼굴을 굳히며 그런 분위기를 정리했다. 그는 원래 이런 장난들 에 관심이 없다. “자, 누구라도 내게 이 일을 구체적으로 알려줘. 아니, 유신이 너는 입 닥치고, 미경이 네가 말해줘.“ “뭐야-... 지금 ‘누구라도’ 라고 말했잖아요.. 왜 나한테는 설명 듣기 싫어요?“ 기혁이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한번 쳐다본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냉정한 눈동자다. “응.” “...........선배, 진짜 너무한다..............” 창문을 조금 내리며 기혁은 담배 불을 붙인다. 찰칵- 이는 담뱃불이 그의 잘생기고 날카로운 옆 모습을 더욱 강조했다. 늘 무표정해서 그렇지, 정말 죽여주게 생긴 선배다. 물론 웃을 때는 더욱 환타스틱하다. 문제는 잘 안 웃는다는 거지만- 유신은 한기혁이 미소 짓는 걸 7개월 만에 겨우 한번 봤다. 그는 어지간한 농담에도 웃는 일이 드물었다. 어쩌다 한번 웃어도 마지못해 미소짓는 게 전부다. 지금처럼 자신이 장난을 치거나 밝게 떠들어도 그는 그냥 한 번 만 에 씹어버린다. “부산시 ***구 ***동의 ‘그 녀석네 베이커리’가 우리가 갈 빵집 이름이 야.” 그나마 미경이 웃겨 죽겠다는 표정으로 유신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 나 사실, 조미경도 무서운 여자다. 그녀는 시시 때때로 유신을 ‘근친교배 ’ 시키겠다고 협박한다. 유신은 혼자서 투덜거리며 차창에 손가락으로 외 계인을 그리기 시작했다. 외계인 한 마리, 외계인 두 마리, 외계인 세 마리 .. “우리가 사이트에 ‘다음 달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올릴 산타 기사’를 모 은다고 공지했잖아? 산타의 존재를 믿거나, 산타를 경험한 사람들 이야기 말야. 이 학생이 가장 적당한 사연을 올렸어. 22살의 윤승진이라는 학생이래. 자기가 사는 동네의 ‘그 녀석네 베이커리’에서 특이한 일이 벌어졌다고.. .....한번 취재 와 달라는군.“ 외계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두 사람이 유신을 무시한 채 둘만 떠들었다. 외계인 네 마리, 외계인 다섯 마리- 내 손끝으로 만드는 외계인 세상~ “무슨 특이한 일인데?” “글쎄.. 윤승진이라는 학생, 본인의 주장은 ‘그 녀석네 베이커리’에서 분명히 산 타를 봤대. 믿을 수는 없지만... 그 녀석말고도 두 명이 같은 이야기를 올렸어. 자기 연락처랑 주소도 올렸고..... 빵집 위치도 여기 있어“ 사실 말이 좋아서 취재 가는 것이다. 이 차에 올라탄 전부는 마감을 넉넉히 남겨 놓고, 따뜻한 부산에 쉬러 갈 생각이다. 그러나 적어도 일 하는 척은 해야 마음 편하다. 유신이 그런 생각으로 혼자 외계인 12마리를 그렸을 때 쯤, 이번에는 기혁이 탁- 하고 소리나게 뒷머리를 쳤다. “이유신!!!” “아우-!!!! 대체 왜 때려요...” 울상을 지으며 장난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가차없이 두 번째 폭력이 옆 머리를 강타한다. “좋은 말로 할 때, 니 외계인들 집에 보내, 이 유신.” 목소리조차 겁나 살벌하다. 한기혁은 정말 인정머리 없다. 정말 너무한다!! “왜요!! 얼마나 다정한데! 내 외계인들이 선배보다 십 이만 오천 배는 다정해요!!“ “다정하고 자시고, 빨리 집에 보내. 내가 너 때문에 세차할 때 요새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아? 날씨가 추워지면 니 외계인들이 차 유리창에 죄다 다시 생긴단 말야!! 한 두 마리도 아니고!! 도대체 몇 개야, 몇 개!!!“ 유신은 울먹이는 표정으로 미경을 쳐다보았다. 기절한 척 하면 편들어 줄지 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조미경이 자신을 가장 좋아하니깐- 그러나 기대는 한순간이었다. 미경은 담배를 문 채,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그 순간 이렇게 말했다. “어디 니 차만 그렇겠냐, 한 기혁.. GAS 사무실 들어올 때, 겨울엔 늘 작살난다. 그 유리창마다 가득 그려진 외계인 하며...“ “..........-!!!!!!!!!!” 역시 정작 중요한 순간에 조미경은 자신에게 등 돌린다. 진작 알았어야 했 다. 자신이 왕따라는 사실을- 2. 바다를 보고 싶다는 유신의 칭얼거림에, 기혁은 일부러 한참 돌아서 그곳에 도착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에도 엄청 오바하는 유신을 보며, 그는 두 번 다시 녀석의 투정을 받아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무슨 한 여름처럼 이 추운 날씨에 창밖으로 몸을 내밀며 ‘에부리바뒤’를 열성적으로 외치던 이유신- 정말 쪽팔려 죽는 줄 알았다. “정말 산타가 있을까?” 자신의 중얼거림에도 상관없이 유신은 혼자 신났다. 목청껏 ‘해운대다!!’ 라고 외치며 창 밖으로 보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손 흔들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대통령이 온 줄 알 거다. 미경이 그런 유신의 모습에 기가 찬 듯 심드렁하게 웃었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 아..... 동백섬 들어가는 저 쪽 길로 차 돌려. 저기 H 호텔이 우리가 머물 곳이야. 박 부장님 카드로 찌익- 그었지.“ 다 도착했을 때 쯤에야 율곡이 뒷자리에서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어찌나 잘 자는지, 기혁은 자신에게 핸들을 맡기고 잠든 이 어린 녀석이 괘씸하지 만은 않았다. 이유신에게 절대 운전을 맡길 수는 없고, 그렇다고 미경에게 맡기자니 체력이 튼튼한 사내 녀석들이 미안하고- 결국, 늘 운전대를 잡는 건 자기 몫이다. 의례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웅...잘 잤다... 오오...이 바다 냄새... 우리 잠깐 내렸다 가죠?“ 빙그레 웃으며 율곡이 부은 눈으로 바다를 쳐다본다. 어렴풋한 저녁이 내려 앉은 초겨울의 부산 바다. 조용하고 서민적인 풋풋함이 이상하게 사람들을 안정시켰다. 차를 주차하기 직전에 맴버들은 잠시 차에서 내렸다. 숙소 호텔이 어차피 바다에 근접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볼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잠깐이라도 노 을에 잠긴 바다에게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 한껏 흥분된 여름이 끝나고 겨울이 시작되는 모래사장이었다. 천천히 걸어 가는 사람들의 발자국들이 조금씩 흩어졌다. 황금빛 태양을 서서히 삼키는 바다. 그 위로는 금빛 마냥 물가루가 뿌려지고, 유유자적 하늘을 나는 갈매 기들이 제 집이라고 말하듯 당당해 보인다. 해변가 주변에는 스케치 하는 노점 미술가들이 앉아 있었다. 세상의 시간이 멈춘 듯 느낌이었다. 조금씩 산책을 하듯 걷는 사람들 곁으로, 혼자나 둘 이서 온 사람들이 바다를 향해 모래사장에 앉아 있었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조용한 자연의 사색시간- 첫 생명을 잉태했다고 믿어지는 바다는 오늘 도 조용하고 내일도 한없이 이야기한다. 기적이란 소소한 사람들의 전설, 그리고 믿음이라고. 네 사람 모두는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주 잠시- 삶의 어떤 부분을 내려놓고, 세상의 시작과 끝- 그 망망한 푸른 물결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여기는 겨울 바다- 지구는 대답하라, 오바. 4. 저녁을 먹자마자, 제각각 편한 차림으로 숙소를 나섰다. 문제의 ‘그 녀석 네 베이커리’ 는 그들의 숙소에서 그렇게 멀지 않았다. 그들은 '그 녀석네 베이커리'에서 조금 떨어진 까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었다. 산책도 즐길 겸, 느릿 느릿하게 걸어 도착했을 때는 밤 9시다. “안녕하세요!” 사연을 처음 적은 22살의 청년 ‘윤승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손님 이 거의 없는 까페였기 때문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앉아 있는 녀석들은 총 3명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소개하며 반갑게 웃는다. “정말 오실지 몰랐어요. 우리가 정말 산타를 봤거든요!“ “..................?” 윤승진은 붉은 색으로 머리를 염색했다. 그러나 얼굴은 깨끗하고 단정한 녀 석이었다. 미끈한 외모에 수줍은 미소를 가지고 있다. 체크 무늬 셔츠 안으 로 목까지 올라오는 하얀 스웨터를 입고 연신 담배를 문다. 옆에 앉은 녀석은 ‘최경민’이라는 동갑내기 친구였다. 그는 덩치가 크고 쾌활한 성격으로, 머리카락을 연신 넘기며 큰 몸동작으로 GAS의 기자들에게 자신을 어필한다. “그 녀석네 베이커리 주인 아저씨가 작년 10월에 돌아셨거든요. 그 집에 아들이라고는 저희보다 한 살 어린 기호가 전부고... 빵집을 운영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처음 몇 개월은 거의 문 닫고 있었어요. “ “아니, 빵집 이름이 정말 ‘그 녀석네 베이커리’란 말야??” 시종일관 딴 짓을 하던 유신이 그 때야 벌떡- 잠이라도 깬 것처럼 소리쳤다 . 기혁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그런 녀석의 머리로 가볍게 주먹을 때린다. “정신 좀 차려, 이유신!!! 아까부터 이야기 했잖아? 그 녀석네 베이커리라고...“ “아, 저는 그 녀석이라고 하길래, 그냥 쉽게 부르는 건지 알았죠.” 옥신각신 거리는 그들의 틈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말을 하지 않던 ‘박산소 ’ 라는 녀석이 살짝 웃으며 만류한다. “정말 간판이름이 그 녀석네 베이커리에요. 돌아가신 아저씨가 지었죠. 지금은 아저씨 아들이 윤기호가 운영하고 있는데.. 원래 아저씨가 가게 운영에서부터 제빵까지 다 했던 것에 비해,.. 녀석은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왠지 기호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다들 즐거운 기색이다. 특히 처음 사연을 보냈던 승진은 커피를 연거푸 두어잔 마시며 목소리 높였다. “그런 기호 녀석이 얼마나 열심히 제빵 기술을 배웠는데요.. 여기는 관광지라서 호텔 빵집도 많고, 대형 베이커리들이 많아요. 그래도 녀석의 빵집이 근방에서는 가장 오래됐어요.“ “그럼 지금은 빵을 누가 만들어?” 간만에 푹 자고 일어난 율곡이 상체를 테이블에 기대며 물었다. 세 청년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말한다. “계약 제빵사가 있어요. 정식으로 초빙한 아저씨요.“ “그럼, 빵은 전문인이 만들고 기호라는 녀석은 운영만 한다는 거야?” “네..거의 그런 식이죠.” 들어보니 그렇고 그런 이야기다. 어린 시절, 동네 어디 쯤에나 볼 수 있었 던 무명 메이커의 작은 빵가게들. 그런 가게를 운영하던 실제 주인이 작년 에 죽었다. 그의 스물 한 살 된 어린 아들이 주변의 대형 메이커 베이커리 들과 겨우 경쟁하며 그럭저럭 운영하고 있다는 이야기. 그러나 이름도 특이 한 박산소가 웃으며 고개 저었다. “그렇지만 일년 사이에 그래도 유명해졌죠. 정말 산타가 있었다니깐요- 그 빵집에.............“ 기혁이 연필을 돌리며 궁금한 듯, 눈썹을 쓱 밀어 올린다. 그는 녹음기와 디지털 카메라를 테이블에 올리며 세 청년을 향해 살짝 웃었다. 미묘하게 휘어지는 눈초리에 유신이 감탄사를 지르며 오바했다. “자, 이야기들 해! 이 형님이 다 실어줄게! 걱정말고 산타에 대해 다 불어!“ 탕- 그리고는 역시 기혁에게 한대 가볍게 맞는다. 이유신은 잊고 있던 것이 다. ‘산타’에 대한 이야기는 이 동네에선 비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 불어댈’ 이야기의 종류도 아니라는 사실을. 세 청년이 웃으며 밝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5. 왜 내 숙소가 유신과 같은 방이어야 하지?- 라고 중얼거리며 기혁은 복도를 걸었다. 옆에선 유신이 뭐라고 뭐라고 시끄럽게 떠들어댄다. 세 명의 제보 자를 만나고 오니 벌써 11시가 훌쩍 넘었다. 영업을 하는 ‘그 녀석 네 베 이커리’는 내일 낮에 방문하기로 하고, 일단은 헤어진 것이다. 붉은 색 고급스런 양탄자를 밟으며, 그래도 H호텔에서는 가장 싼 방을 향해 키를 꽂는다. 자동으로 열리는 문과 켜지는 스탠드를 보며 그는 유신이 들 어오기 전에 잽싸게 문을 닫으려 했다. “우아-!!! 너무 하잖아요!!!!!“ 이유신이 호들갑을 떨며 발을 밀어 넣기 전까지-! “너랑 같은 방을 쓰는 건 내 의지가 아냐. 미경이가 그렇게 잡은 거지...“ “미경이 선배는 내 수호천사에요. 근친교배의 야욕만 버린다면 더 좋겠지만...“ 기혁은 스웨터 끝을 잡아당겨 위로 벗으며 내심 의아해했다. 도대체 저 ‘ 근친교배’라는 말은 왜 나온 걸까. 미경의 입으로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 만, 왜 유신이 저 말에 그렇게 떠는지 모르겠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유신이 청바지를 질질 끌며 나간다. 녀석이 너스레 떠는 목소리와 미경의 시큰둥한 목소리가 같이 들렸다. “우아- 미경이 선배! 나를 위해 특별히 준비된 치즈케익이군요!! 룸서비스로 자리 굳히셨어요?“ 이윽고 들리는 ‘퍽-’. 아마도 미경이 주먹을 날린 게 분명하다. 어찌, 유 신의 저 오바근성은 시간에 따라 자연 비례하는 것 같다. 이유신의 오바 장 난은 어쩌면 유산균일지도 모른다. 냉장고에 넣어 푹 숙성시키면 더욱 자연 발효되는-! “케익하고 커피 준비해 왔어. 아까 그 세 녀석하고 취재한 거 조금 정리하고 자자구.. 이틀 뒤에 부장님 오시면 좀 그렇잖아? 뭐라도 할 말이 있어야...“ “...할 말이 있어야 놀러 온 걸 안 들키죠.” 율곡이 미경에게서 커피포트를 받아들며 뒤잇는다. 유신은 잠시 치즈케익과 기혁을 번갈아보며 작은 테이블을 질질 끌었다. “그럼, 나랑 기혁이 선배는 침대에 앉고, 미경이 선배랑 율곡이는 여기 앉 아.” 기혁은 아무 말도 없이 가볍게 고개 끄덕이며 갈색 무늬 스웨터를 다시 걸 쳤다. 갈색의 바탕 위에 크게 노란색으로 가로줄이 두 개 들어가는 스웨터 다. 한 눈에 보아도 먹음직스러운 치즈 케익도 마찬가지로 노르스름한 바탕 에 옅은 갈색이었다. “아아- 케익 너무 좋아.. 치즈 케익 너무 좋아...“ 유신이 한 입에 덥썩 물며 중얼거린다. 삐쭉 삐쭉 솟은 녀석의 뒷머리를 보 며 기혁은 고개를 절래 절래 저었다. 미경의 속셈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아 마, 저 케익으로 유신의 입을 다물게 만들려는-!!! 율곡이 빙그레 웃으며 그런 유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혁 역시 한 입 먹어 보려는 마음으로 손을 내민다. 아까 저녁을 먹고 한참 걸어다녔더니 의외로 출출하다. 그러나 그 때, ‘찰싹-’. 유신이 우걱거리며 자신의 손등을 매 몰차게 후려친다. “..............?” “선배는 먹지 마요. 저는 관계 중에 배가 걸리적 거리는 거 싫어요. 나는 아무리 먹어도 살 안 찌니깐 괜찮지만.. 선배는 안돼요.“ 이게 미쳤나- 하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친다. 기혁은 정색을 하고 녀석의 손 에서 케익 한 조각을 빼앗았다. “내가 왜 너랑 관계하냐, 이 새꺄....” “왜냐뇨!!” 그러나 도리어, 자신이 억울하다는 듯 녀석은 뻔뻔스럽게 중얼거렸다. “왜냐뇨! 이런 황금 기회가 어디있어요? 멋진 풍경, 스위트 룸~, 둘 만의 시간, 뽀송 뽀송한 침대보! 신혼 여행이 따로..“ 미경이 피식 웃는다. 그녀는 수첩을 꺼내 아까 만난 세 녀석들의 이름을 적 으며 중얼거렸다. “그 뽀송 뽀송한 이불 너 혼자 말고 잘 자, 이유신. 괜히 기혁이한테 죽지 말고.. 제 가슴에 왕자 새겨져.. 마른 것 같아도 죽여주는 몸이지..“ “.............누나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녀석이 눈을 흘기며 매섭게 물었다. 율곡이 커피를 홀짝이며 무심하게 그 말에 입을 연다. “유신이 선배.. 우리도 곧잘 당하잖아요? 샤워 할 때마다 미경이 선배가 문을 벌컥 벌컥 여는 거...............“ ‘흐음’..이라고 짧게 신음을 흘리며 유신이 생각에 잠긴 듯 눈동자를 굴 린다. 그 조용해진 짧은 순간에 드디어 미경이 한숨을 쉬며 수첩을 폈다. “자, 정리해 줄게. 우리가 만난 사람들부터, 차례대로..“ 일단, 1. 사건이 일어난 장소- 부산의 해운대 구 근처 ‘그 녀석 네 베이커리’. 2. 사건이 일어난 시간- 작년 12월 23일부터 25일 새벽 5시 경까지로 추측 됨. 3. 일어난 사건- 해운대구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크리스마스 케익이 배달됨. 배달 시간은 밤 11시에서 새벽 5시 사이로 추정. 크리스마스 케익 은 모두 ‘그 녀석네 베이커리’에서 만든 케익. 주로 독거노인이나 소년소 녀 가장,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집으로 배달됨. 4. 사건의 목격자 - 아주 많음. 일명 크리스마스 케익을 배달한 사람이 크 리스마스 산타라고 믿는 뭇 동네 꼬마들로부터 해서 제보한 세 명의 청년까 지. 5. 사건의 용의자 - 산타! 믿을 수 없지만 다들 그렇다고 말 함. 목격자들 은 적어도 스무명 안팎이며, 그들은 비슷한 시간대에 각각 다른 장소에서 산타 차림의 용의자를 발견. 산타가 수십명이 아니라면 이뤄질 수 없는 일. 다행히 루돌프 목격자는 없었음. 6. 범인의 몽타주 - 산타의 전용 복장. 붉은 색 옷, 튀어나온 배, 하얀 수 염, 붉은 모자, 선물 꾸러미. 7. 용의자 제외자 - 절대 ‘그 녀석네 베이커리’ 빵집 주인인 윤기호는 아 님!. 당시 윤기호는 적어도 열 명이 넘는 사람들에 의해 알리바이가 제공됨 . 크리스마스 시즌에 장사가 안 되는 바람에,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신 그 녀석은 정신이 없었음. 8. 제보자 - 22살의 윤승진(이사짐 센터에서 근무), 22살 친구 박산소 (호 텔에서 근무), 22살의 최경민(학생) 셋 다 초등학교 동창. 빵집 주인인 윤 기호와 동네 꼬마 친구 녀석들. 미경이 정리한 내용을 읽자, 케익을 먹으며 유신이 눈동자를 굴린다. “산타라... 정말 산타가 있는가보네..............“ “있을 리가 없지.” 어깨를 으쓱하며 기혁은 담배를 찾았다. 율곡이 주머니 안에서 한 갑 꺼내 놓으며 불까지 켜 준다. 그런 율곡의 서비스 정신에 열이라도 받는 건가- 유신이 케익 가루를 튕기며 열변을 토한다. “있다고 하잖아요, 얘들이! 이 동네 꼬마들이 다 봤다고 하는데요, 뭘!“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더군다나 산타는 수입제라구, 수입품..“ 여전히 신랄한 기혁의 표정에, 유신이 발끈한 표정으로 손을 펼쳤다. 마치 뭔가 진지하게 제안할 때 흔히 나오는 제스추어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자신이 살짝 흘겨보자, 녀석은 아예 벌떡 일어섰다. “거봐요, 선배는 정서가 메마른 거라구요, 정서가!!“ “산타하고 정서하고 무슨 관계냐?” “이 동네 얘들이 다 있다고 믿는데, 선배도 믿어주면 어디 덧나요?” 도대체 왜 시비를 벌린 건지 모르겠다. 미경이 그런 자신들을 한심하다는 듯 번갈아 쳐다보았다. “둘 다 진정하지, 이제?” “아, 진정하게 됐어요? 지금 기혁이 선배가 산타가 없다고 하잖아요!“ 마침내, 참다못한 기혁이 유신의 청바지 끝을 잡아당긴다. 이 녀석은 왜 쓸 데없는 일에 고집이 강할 걸까? “그래, 이유신. 알았으니깐 앉아. 나는 어릴 때 크리스마스라고 선물 한번도 못 받아봐서 정서가 무디다, 무 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 놓고, 괜히 기혁은 마음이 따끔거렸다. 그러고보니, 갑자기 떠오른 것이다. 유신이 녀석이 어린 시절에 엄마를 잃었다는 것- 바 로 그 그리움 때문에 엄마가 아닌 다른 영혼들, 귀신을 보게되었다는 고백 들이. “그럼, 우리 내기할까요, 선배?” 그러나 이런 짧은 동정심과 죄책감도 아주 잠시- 이유신이 밝은 다갈색 눈 동자를 빛내며 얼굴을 붙인다. 역시 사람을 5분이라도 가만히 두지 않는 녀 석. “무슨 내기?” 미경이 두 어 개의 담배갑 중에 몇 개를 뒤적이며 흥미가 간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저럴 때 호응해주면 안 되는데, 더욱 기가 산 이유신이 이렇게 외 쳤다. “산타가 있다고 증명되면 기혁이 선배가 나랑 한번 자주기...” “.............???!!!!!!!!!!!!” 그런 걸 이렇게 대놓고,- 그것도 같은 직장 동료들이 있는데서 말하는 녀석 이 어디있냐!!! 기혁이 녀석을 향해 정말 강렬한 주먹을 날리려는 찰나였다. 그러나 미경이 쓰윽 웃으며 손가락 두개를 튕기고 있었다. “좋아. 대신 내가 보는 앞에서!...“ “...............-!!!!!!!!!!!!!!” 기혁은 GAS에 입사한 이례로 처음 깨달았다. 자신은 이 무리들에 도저히 섞 일 수 없는 왕따였던 것이다!- 이 사람들은 자신만 빼놓고 전부 제정신이 아니다. 정말 그렇다고 오늘 더 실감하게 된 것이다. 6.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미경이 무심한 표정으로 기혁에게 말했다. “당신은 유신이랑 둘이 취재 갔다 와.” 역시 나는 왕따였던 거야- 기혁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멈췄다. 어차피 미 경에게는 ‘따진다’라는 개념이 통하지 않는다. 도대체 그녀가 왜 유신에 게 ‘근친교배’의 야욕을 가졌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이 쪽도 근친교배 당하기 전에 입을 닫는 게 낫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역시 해변가를 거니는 둘 만의 데이트라니~ 캬하~♥ 이건 거의 뮤직비디 오 수준 아니에요? 와우, 그림 나온다, 그림 나와~” 기혁은 말없이 바닷가만 쳐다보았다. 대답하지 않는 게 좋겠다. 저런 오바 모드의 현란한 대사를 날릴 사람은 이유신 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기혁이 선배가 바닷가를 달리며 ‘나 잡아봐라~’ 하는 것만 남았는 데 말이죠!” 그래, 너 잡혀봐라. 아작을 내줄테니. 기혁은 여전히 냉랭한 시선으로 유신을 한번 힐끔 쳐다보다가 걸음을 옮겼 다. 해변가 끝까지 걸어가 J모텔 안 쪽 골목을 돌면 바다가 눈에서 사라진 다. 대신 이벤트 대행과 까페를 같이 겸한 작은 사무실이 나타났다. 이 곳 이 바로 오늘 조미경에게 ‘명’받은 취재 구역이다. “어서오세요!!!” 현란한 유신의 오바모드를 무시하고 기혁은 유리문을 열었다. 크리스마스고 뭐고 지겨워 죽겠다. 애인하나 없이 이 여자 저 여자를 전전하며 살아온지 어언 몇 년, 그러나 아직도 자신은 솔로다. 이런 특별한 어퓨 데이 (a few day)가 다가올 때면 늘, 지나간 옛 사랑의 아릿한 기억이… “아, GAS에서 오신 기자분들이시죠? 어서오세요!!!” … 기억이 떠오르다 말았다. 막 옛사랑의 추억을 떠올릴 틈도 없이 이벤트 회사의 매니저가 반갑게 손을 닦으며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6층에 구비된 까페에 자리를 잡았다. 넓고 깨끗한 겨울 바다가 멀리서 보인다. 그 상태로 한 두 마디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따뜻한 커피가 나왔다. “21세기에 산타크로스라니 믿기 어려워서 찾아왔습니다. 이 이벤트 회사에서 산타 복장을 임대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작년부터 해서 임대해 간 사람들의 목록을 구할 수 있을까 해서요.” 취재 수첩과 PDA를 같이 꺼내들며 기혁이 묻자, 매니저는 잘 뻗은 머리카락 을 뒤로 넘기며 노트북을 연결했다. 유신은 이들이 대화와는 상관없이 까페 의 잘생긴 아르바이트 생들에게 찝쩍거리고 있을 뿐이다. “오! 부산 남자들은 죄다 잘생겼나 봐요.” “…….” 그러지 않으려 했건만, 그 모습을 보려니 기혁은 한심한 생각이 물씬 들었 다. 그래, 어서 나가서 그 잘생긴 녀석들이랑 ‘나 잡아봐라’ 하고 뮤직비 디오를 찍지 그래, 이 천하의… “아, 여기 있네요.” 그 순간, 매니저가 기혁을 향해 손가락을 퉁- 하고 튕긴다. 기혁은 본능적 으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매니저의 긴 손가락이 노트북 액정 화면을 짚 으며 몇 사람의 이름을 가리켰다. “여기 이 분들이 작년 크리스마스 즈음에서 산타 복장을 임대 해 간 분들 입니다. 저희 회사에 구비된 산타 복장이 총 10벌 정도인데, 6벌은 근처 호 텔이나 회사에서 임대를 해 갔고요, 나머지 4벌이 개인 명의로 임대 되었거 든요….” 기혁은 그 이름들과 그들의 옆에 적힌 숫자를 차례대로 PDA에 입력한다. 아 마도 숫자 상의 연관으로 보건데, 그것은 날짜처럼 보였다. 여전히 취재와 는 상관없이 옆에서 시끄러운 유신을 무시한 채, 그는 매니저의 눈을 뚫어 지게 쳐다보았다. “여기 18, 19, 20… 이런 식으로 표기 된 것은 빌려간 날짜입니까?” “네, 그리고 그 뒤에 파란 색으로 되어 있는 날짜가 물품이 회수된 일시 입니다.” 별 다른 이상이 없어 보인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누구나 그렇듯, 회사나 단체에서 자주 크리스마스 용품을 대여해서 이벤트를 여는 것이다. “이 근처에 이런 식의 이벤트 회사가 몇 군데나 됩니까? 산타의 복장을 빌 릴 수 있는 곳이 몇 군데이죠?” 사무적이고 차가운 기혁의 목소리에 매니저가 잠시 눈썹을 움직였다.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그는 손가락을 꼽더니 이내 확신에 찬 어 조로 대답한다. “요새는 인터넷으로도 많이 대여하기 때문에 찾기 힘드실 겁니다. 하지만, 근처에서 개인이 대여할 정도라면 8 군데에서 10군데 가까이 됩니다.” 그러나 저러나 많은 숫자다. 그 많은 이벤트 회사를 돌면서 각 개인의 신상 을 조사하고, 그것도 이틀 뒤에까지 모든 상황을 조사하기에는 아무래도 무 리다. 더군다나!!! 저렇게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취재 파트너와 함께라면! !! “그런데 두 분은 모델 아니신가요?” 미끈하게 잘생긴 매니저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노트북을 덮으며 묻는다. 기혁은 의외로 소득이 없다는 것 때문에 조금 무력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테이블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자신과는 달리, 유신은 카운터 옆의 바(bar )를 독차지 하고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농을 걸고 있었다. 저런 녀석이 모델이냐고? 무대에서 코믹쇼를 안 벌리면 다행이지…. “전혀요. 모델을 취재하면 했죠.” 냉소적인 대답에 매니저가 머쓱한 듯, 귓불을 긁는다. “하긴, GAS 기자들 이시니까요. 그나저나 놀랐습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해운대에서 특종꺼리라도 있나보죠? GAS 라고 하면, 그런 일에 움직이는 기 자들 아닙니까?” 기혁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마치 이 곳을 제 집처럼 찝쩍 대마왕이 되어버린 유신을 질질 끌고 나가야 한다. 제길, 아무리 취재를 빙자해서 놀러왔다 해도 저런 파트너와 계속 같이 있어야 한다니… “해운대에 산타크로스가 나타났다고 해서요.” 별 거 아니라는 듯 대답하는 자신의 목소리에 매니저가 ‘아하~’라고 짧은 탄식을 꺼냈다. 그리고는 자신도 마침 생각났다는 듯 빈 커피잔을 챙기며 고개 끄덕인다. “아, 그 일 때문이시군요.” “……???” 혹시나 이 쪽에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혁은 순간적인 무기력함을 털 어버리고 휙 하고 고개 돌린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전형적인 관광지의 세 련된 매니저가 씽긋 웃었다. “이 동네 사람들에게는 유명하죠. 저도 목격했으니까요.” “……!!!” 안 돼.- 기혁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매니저를 향해 고개 젓는다. 산타 따위가 있 다니 절대로 안 된다. 저 빌어먹을 이유신 녀석이랑 내기를 했단 말이다. 만약 정말 산타가 있다면 저 악랄한 조미경 앞에서 이유신과 sex를 하기로 말이다.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정말 봤어요. 저도 그 날 까페 문을 닫고 새벽 3시 쯤에 집으로 돌아가는데 봤습니다.” “헛것이 아닐까요.” 애써 기대를 품고 물어봤지만, 매니저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한다. “헛것이라고 치기에는 너무 분명하던데요. 뒷모습이었지만, 정확히 산타였 습니다. 저는 누군가가 이벤트라도 하는 줄 알았죠. 당시에는 제가 차에 타 고 있어서 몰랐지만….” “고양이가 아닐까요?”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었기에 기혁은 반문을 하자마자 머리를 감싼다. 세상의 어느 고양이가 산타처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고양이들이 우르르 모여서 동춘 서커스를 하듯 사람 키만큼 탑을 쌓지 않는 이상!!! 역시나, 매니저도 고개를 저으며 웃는다. “그렇게 사람만큼 크고 빨간 옷을 입은 고양이는 못 봤습니다.” “사람 키라니… 어느 정도인가요?” 바로 그 찰나에 떠오른 것이다. 이것을 취재하면서 장난처럼 시작했기 때문 에 아무도 범인(?)의 키나 몸무게, 이런 것들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목격대상이 ‘산타 옷을 입었다’ 외에는 몰랐던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심각한 함정이다. 그 누가 산타를 남자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가. “글쎄요, 기자님 보다 3~5 cm 정도 조금 더 컸으니까 한 180cm 정도? 분장 을 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배에 살이 많고, 흰 수염을 붙이고….” 매니저는 당시 자신이 목격한 대상을 반추하듯 손으로 가늠하며 대답했다. 기혁은 그 순간에 처음으로 빙긋이 웃었다. 그동안 중요한 것을 체크하지 않았다. 이 남자의 말로 인해 그 중요한 체크 사항이 떠오른 것이다. 7. 유신을 빼내 오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는 해운대의 바닷 거품에서 탄 생한 미의 화신 비너스처럼 까페 종업원들에게 껄떡거리기 바빴던 것이다. 상당히 무신경한 손길로 유신의 뒷덜미를 잡고 질질 끌 듯 빼 내온다. 그 때서야 지구로 다시 도착한 외계인 우두머리 이유신이 시침을 뚝 떼고 우아 하게 걷기 시작했다. 이 망할 놈의 인간아, 제발 일 다운 일 좀 해라!!! “뭐 좀 건진 거 있어요?” 차가운 겨울 바다 바람이 귓속을 파고든다. 외투 안 쪽에서 벙어리 장갑을 낀 채로 다시 PDA를 꺼내들자, 유신이 이번에는 상당히 친한 척을 하며 옆 에서 알짱거린다. 그러나 기혁은 그가 썩 귀찮았을 뿐이다. 이 순안에 이유 신이 도움이 된다면 딱 한 가지 정도이다. 숨소리가 새끈거리며 목덜미에 와 닿는 순간 조금 따뜻했다, 뭐 그 정도? “너야 말로 상당히 뭔가 건지는 거 같던데?” 은근히 비꼬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되묻는다. 그러자 유신이 맑 은 눈빛으로 환하게 웃었다. 빌어먹을. 이런 종류의 질문은 웃으라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아, 다 봤어요?” 그럼, 눈 뜨고 그걸 못 보면 그게 사람이냐? “우리 말이야….” 기혁은 그 일들에 대해 더 이상 대화할 가치를 못 느끼며 다소 딱딱하게 입 을 열었다. 이유신은 놀러온 건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아니다. 아니, 놀더라 도 부장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요령은 있어야 한다. “우리 말이야, 뭔가 접근하는 방식이 틀린 것 같아.” 가뜩이나 산만한데, 겨울 바다를 맞이하여 더욱 산만해진 유신을 향해 차갑 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유신의 대답이 더 가관이었다. 인간 자체는 못말리 는 골치덩어리지만, 그 눈만은 어쩔 수 없을만큼 아름다운 시선을 빛내며 말이다. “그러게요.” 웬일이냐, 네가…. 그렇게 진지하게? “그러게요. 정말 틀린 것 같아요. 제가 선배에게 접근하는 방식이 틀린 거 맞죠?” “……!!!” 그럼, 그렇지. 네가 인간답고 진지하게 내 말에 대답해 줄 녀석이 아니지. 말을 말자, 말 을 말어. “진지하게 들을 게요, 지금 하는 방식이 뭐가 틀렸다는 겁니까?” 찌릿하게 노려보며 담배를 빼물자, 차가운 겨울 바람 속에서 유신이 부리나 케 달려왔다. 어느새 너스레를 감춘 녀석이다. 놀랍다, 그 순식간의 태도변 화가… “보통은 말이지, 어떤 인상착의를 묘사할 때 키나 몸무게, 혹은 머리스타 일, 얼굴의 특징… 이런 걸 설명하잖아?” “…그렇죠.” 그래, 그거였다. 이러니 미로 속에서 바늘 찾는 것처럼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로 느껴졌지. 세상에 산타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기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유신을 향해 휙- 하고 돌아선다. 녀석이 놀란 듯, 예쁘장한 눈매를 살짝 가늘게 뜨고 있었다. “그런데 왜 산타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들이 본 게 ‘산타’복장이었 다는 것만 이야기 했을까…?” 유신이 그 말에 생각을 하는 듯 잠시 눈동자를 굴리다가, 이내 손가락을 튕 긴다. 반짝 반짝 거리는 눈동자가 즐겁다는 기색이었다. “……산타는… 일종의 브랜드(brand) 니까요. 예를 들어, 길거리에서 경찰 을 봤다고 해서, 키가 얼마에, 몸무게가 얼마이고, 나이가 어느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경찰을 봤다고 말하진 않아요. 그냥 경찰을 봤다… 라고 만 말하죠. 경찰이나 산타는 하나의 브랜드(brand)죠.” “… 그러니까, 사람들은 일종의 브랜드(brand)를 봤을 때는, 구체적인 인 상착의가 아니라, 그 브랜드를 대표하는 성질만 기억하고 있다는 거군. 빨 간 옷, 튀어나온 배, 하얀 수염, 검은 장화… 그런 것들이 눈에 먼저 들어 오니까…” “… 그렇죠. 그러니까, 산타를 보는 순간, ‘아, 산타다!’ 이게 끝이죠. 일종의 사회적 세뇌라고나 할까… 문화적 세뇌라고나 할까…” 기혁은 빙그레 웃었다. 그 말이 중요한 것이었다. 하나의 브랜드, 하나의 상표, 하나의 집단. 그는 연기가 나오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신이 나 있는 유신의 가슴을 손가락을 툭툭 건드렸다. 이봐, 이번에는 내가 이길 거다. “그럼, 이유신… 잘 생각해 봐. 산타가 100명이 있어도 보는 사람들에겐 모두 산타가 아닐까?” “……!!!” “예를 들어, 연필 한 다스 안에는 12개의 연필이 있지만, 그 상자 안에 있 는 연필의 디자인은 다 똑같아. 그렇지만 개체이니까 12개들의 특징은 각각 있겠지. 조금 남보다 길이가 짧은 연필, 나무 색깔이 조금 다른 연필, 흑 심의 결이 고르지 않은 연필… 등등. 12개라고 해서 모두 같은 게 아니지. ”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유신이 아주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12개의 연필이 한 다스라면, 12개가 다 꺼내져서 바닥에 뒹굴고 있어도 우리는 보통 12개의 모양이 같다는 것만 알고 있죠. 하나의 상자에 들어가니까, 각각의 특징은 중요하지 않은 거죠.” “바로 그거야. 이틀 사이에 아주 많은 동네 사람들이 ‘동시에’ 산타를 봤다고 했어.” “… 산타가 여러 명이라는 거군요.” 드디어 듣고 싶던 결론이 유신의 입에서 나오자, 기혁은 환하게 미소지었다 . 그러자 유신은 피식 웃으며 조금 난처한 듯 덧붙인다. “그럴 듯한 추리예요. 모두가 조금씩 다른 집에서 산타를 동시에 봤기 때 문에 그것이 신비로웠을 뿐이지만…” “…….” “사실은 그냥 트릭이라는 거네요. 신비감이 산타라는 존재를 부각시켰지만 , 누구든 산타 복장을 하고 여러명이 각각 다른 장소에 있으면 목격한 사람 에게는 어쨌든,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게’ 산타가 목격 된 거니까요. ” “…good!" 기혁은 정말 마음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겼지, 내가?- 라고 말하고 싶었지 만, 아직 율곡이나 미경을 통해서 확인해야 할 것이 많으므로 일단 참고 있 었다. 그러나 유신은 조금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그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 을 겨울 바다 위에서 나부끼며, 조용히 쳐다보고 있었다. 까페 안에서 흥청 망청 하던 태도랑은 더 달라보인다. “……???” 일순 너무나 침착해진 눈빛에 기혁이 녀석을 응시하자, 유신의 길고 검은 속눈썹이 깜박였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외모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 녀석 이다. 그 놈의 괴팍하고 엽기적인 성격이 문제이지만… “이겨서 좋으십니까?” “……!!!”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물었을 때, 기혁은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탁 틔 인 겨울의 바다, 갈매기들이 유유하게 날며 바다위로 그림자를 뿌리고 있었 다. 짧은 한 겨울의 오후 햇살은 유신의 등 뒤로 쏟아지고, 선량한 시민들 이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다. 밟고 있는 모래사장에서 시원한 파도소리가 진동으로 울려온다. 기혁은 그 순간에 마주친 시선을 뭐라고 설명할 수 없었다. 하필이면 이 순간 떠오른 것이다. 유신이 자신과 펠라를 했다고 고백하고 뺨을 맞던 순간의 그 모습 이…. 꿀꺽…. 왠지 갈증이 심하게 나는 바람에 기혁은 그 시선에서 등을 돌렸다. 아직도 목이 마르다. 뭔지는 모르지만, 이유신은 접근할수록 위험한 생각이 들었다 . 8. 조미경은 대단한 여자다. GAS 팀들은 그걸 알고 있었지만, 사실 섣불리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러 나 율곡은 모두가 모인 로비에서 부드러운 눈빛으로 미경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미경이 선배는 황제예요.” 기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신은 더욱 공감간다는 표정으로 고개 를 끄덕였다. 그러나 율곡은 그 큰 키를 구부정하게 앉으며, 전화를 받는 조미경을 힐끔 쳐다보았다. 녀석은 늘 그렇듯, 조용하고 깊이있는 목소리로 덧붙인다. “보통 지금까지의 여자분들은 늘 여왕이거나, 공주였죠.” “…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 “그러나 미경이 누나는 황제예요. 도무지 표현이 안 돼요.” 율곡이 그렇게 말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조미경과 GAS 맴버들은 저 녁을 먹은 후에 로비에서 객실로 가고 있던 도중 전화를 받은 것이다. 전화 는 부장에게 왔고, 부장이 내일 아침에 도착한다는 말과 함께 여러 가지 일 장의 연설을 늘어놓은 것이다. 물론 이런 일에 가만히 있을 조미경이 아니다. 그녀는 전화를 빼앗아 들고, 수화기 너머의 부장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그런 일은 좀 알아서 하세요, 부장님!!! 불평을 하고 싶다면, 혼자 다음( daum)에 까페를 만들고 혼자 욕하고 있으란 말입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에 누가 놀러 온 사람 있는 줄 알아요? 회사 경비를 아껴 쓰지 않는다구요? 누가요? 우리는 땅 파먹고 기사 쓰는 줄 알아요? 같은 월급 주고 더 나은 기자를 갖다 쓰세요!” 음, 부장님 너무 당하는 걸… “뭐라구요? 알아서 하세요. 오시든지 말든지요.” 너무 막 나가는 경향도 살짝 있다. 그러나 미경은 부장의 천적이다. 율곡의 무심한 태도도 부장의 천적이었지만, 조미경의 강력한 파워는 GAS 안에서 당할 사람이 없다. 미경이 통화하는 동안, 여러번 ‘닥치세요!’가 나왔고, ‘이런 좆같은 세 상에서~’가 세 번 나왔다. 유신과 기혁, 그리고 율곡은 말없이 로비에 앉 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전화기 폴더를 탁- 하고 닫는다. 이내 그 중성적인 미모로 환하게 웃으며 모두를 향해 돌아보았다. “자, 오늘도 치즈케익과 커피 어때? 모처럼 해운대에 왔는데 바다 구경을 안 할 수가 없지, 안 그래?” 땅 파먹고 기사 쓰는 거 맞다. 9. 그런 미경이 포크를 휘둘렀다. “아하! 그렇구나! 기혁씨가 생각한 게 맞는 거 같다.” 그 쯤에 맴버들은 얌전히 치즈케익을 먹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도대체 조미경이 오늘 무슨 일을 했을까, 라고. 물론 입 밖으로 묻는 사람은 아무 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목격한 산타라는 게 사실은 여러명의 분장이었다 이거지? 그렇게 해서 많은 장소에서 동시에 목격이 가능했다라~ 음, 그런 것 같아.” 기혁의 표정이 밝아졌고, 유신은 아무 말 없이 커피만 마시고 있었다. 담배 를 찾기 위해 손을 뻗자, 미경이 먼저 남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기혁은 참 았다. 참지 않으면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이 담배를 사러 가야하니까. “그렇게 설명하면 말이 되네요.” 율곡이 그 순간에 조용하고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포크를 오른손에 들고, 왼손으로 오늘 정리한 리포트를 넘기면서 차분하게 덧붙였다. “그렇게 말씀하시까, 왜 부산 시내에 있는 각종 이벤트 회사에서 해운대로 대여한 산타 복장이 많았는가… 하는 문제가 해결되네요.” 오늘 율곡은 혼자 해운대 이외 지역을 돌아다니며 이벤트 회사들과 취재를 했던 것이다. 점점 진실에 가까워지자 기혁은 신이 났다. 그러나 유신은 동 요하지 않고 조용하게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긴, 장난으로 그랬겠 지, 누가 그 따위 내기를 진짜라고 생각하겠는가. “근데 말이죠….” 미경이 스파르타 조교처럼 내일 일정을 잡는 사이, 율곡이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묻으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기혁과 유신, 둘을 쳐다보며 뭔가 대단 히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갑자기 기혁은 내심 불안해진다. 율 곡이 느긋하고 조용한 성격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는 유신 이상 으로 이 GAS에서 미스테리한 존재다. 그런 그가 작심하고 뭔가 이야기 할 때는 참으로 겁이 나는 것이다. “근데 도대체 누가, 왜,- 라는 게 마음에 걸리지 않습니까?” “…….” 기혁은 한숨을 쉬었다. 역시 이율곡이 지적할 줄 알았다. 기사를 쓸 때 필 요한 ‘육하원칙(六何原則)’에 대해서. 따져보면 맞는 말이다. 기혁은 자신이 어느 정도 진실에 접근했다는 건 알 지만, 그렇게 말하더라도 사실 확인이 불가능하다. 누군가 산타 분장을 하 고 돌아다녔다면 말은 되지만, 기사화 될 수는 없다. 기사를 쓸 때 가장 필 요한 게 과학적 접근이다.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이렇게 6가지를 설명할 수 있어 야 한다. 5W1H라고도 불리는 이 원칙은 사회적인 현상을 다룰 때 가장 강조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그 녀석네 베이커리’ 사건에서도 여섯가지 접근이 모두 설명 되어야 한다. 비록 ‘어떻게’와 ‘어디서’‘언제’‘무엇을’ 이 네 가지 는 그런대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해도, 율곡의 말처럼 ‘누가’ ‘왜’ 이 두 가지가 빠지면 비극이다. 그런 기사는 기사가 될 수도 없고, 진실이 될 수 도 없다. 목적이 없고 주체가 없는 결론이 어디 있는가. “그걸 찾아야지, 그게 제일 중요한 거니까.” 미경이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일정표를 치켜들었다. “좋아, 율곡씨 말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여섯가지 원칙 중에서 네 가지야.” 미경의 써머리(요약)에 다들 시큰둥한 표정이다. 조미경, 요번 기사에는 혼 자 하루 종일 놀아놓고는 꼭 지금처럼 결론을 정리해버린다. 분명히 겨울 바다를 보는 순간, 그녀의 머리 속에서는 그녀석네 베이커리고 뭐고 다 떠 났음이 분명한데도…. 그러나 역시 그런 불만을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의례히 미경의 그런 태도에 다들 군말 없이 따르는 편이니까. “우리는 적어도 4가지를 알고 있지. ‘어디서’‘언제’‘무엇을’ 까지는 알고 있지. 기혁씨가 추측한 ‘어떻게’ 까지도 내일 쯤이면 확인해 볼 수 있어.” “그거 아까 율곡이가 다 한 말이잖아요. 어쨌든, ‘누가’와 ‘왜’가 가 장 중요한 거라구요. 누가 산타를 했느냐, 그리고 왜 해야 했느냐…” 유신이 겁 없이 입을 열었다. 저런…. 율곡이 작게 키득거리며 쇼파에 얼굴 을 묻었다. 미경의 험악한 눈길이 유신에게 향했음은 물론이다. “이유신, 아가리 닥쳐.” “…….” “너 오늘 율곡이 방에 가서 자.” “…누나…” “기혁씨는 오늘 내가 접수한다.” 율곡의 웃음소리가 더 깊어졌다. 기혁은 한숨을 쉬며 호텔 창 밖으로 바라 보고 있었다. 유신과 미경의 튀는 대화가 연신 방 안을 시끄럽게 했다. 이 미 기사 따위는 그 둘의 머리 속에서 사라진 것 같았다. 한참을 옥신각신하는 그들 사이에서 율곡이 입을 연 것은 시간이 좀 흐른 후였다. 그는 치즈 케익을 다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나른하게 말문을 틔웠 다. “…그러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 정작 기혁 자신은 관심이 없는, ‘강기혁을 누가 접수하느냐’의 문제로 계 속 싸우던 미경과 유신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창 밖을 쳐다보며 딴 청 피우 던 기혁도 물끄러미 율곡을 바라보았다. 율곡은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댔지 만, 이내 머쓱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아~ 들었어요?” “… 그걸 혼잣말이라고 했냐? 그렇게 크게?” 미경의 관심이 다시 율곡에게로 쏠렸다. 베개를 안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유신을 쳐다보며 율곡이 쓰윽 웃었다. 이러나 저러나 유신의 편은 율곡 밖 에는 없어보였다. “뭐가 생각났다는 건데?” 기혁은 미경이 무의식 중에 담배를 찾는 손길에 긴장하고 있었다. 담배가 떨어졌다. 누군가는 나가서 사와야 한다, 이 엄동설한에…. 유신은 미경의 강압적인 명령이 자신을 벗어난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리 고 사실 조미경은 이 기사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런 매우 산만한 상황 속에서 율곡이 부드럽게 웃으며 한마디를 남겼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게 뭔지 알았어요.” “……!!!”